제23화. 작은백합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시간들

by 전태현 작가
ChatGPT Image 2025년 9월 2일 오후 10_07_57.png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난 2년 동안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변화였다.



대통령과 평검사의 대화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그는 유난히 서민적인 대통령으로 기억되었다.



다행히 현 정부는 나에게 칼끝을 겨누지 않았다.

고졸 출신의 변호사였고,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기에 다른 대통령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용히 지냈다.



우리 집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수아 비서가 2층으로 완전히 이사해 온 일이었다.



초희가 떠나고 한 달쯤 지난 뒤였다.

그렇게 2년이 흐른 것이다.



3월의 햇볕은 참으로 따사롭다.



“회장님.”
수아가 다가와 나를 부른다.

오늘은 토요일,

우리는 오전 10시에 마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은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타이트한 청바지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자켓을 한 손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나 또한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가벼운 잠바를 걸쳤다.

오늘은 서울 근교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들의 첫 데이트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서른다섯 살의 나이 차를 극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수아의 미래가 걱정된다.

소문이 무서운 세상이다.


그래서 나 역시 쉽게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물론 수아는 내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 또한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 물었다.



“어디로 가고 싶니?”
수아가 웃으며 말했다.
“운전은 제가 하는데, 기사가 가는 대로 가야죠.”



우리 둘은 소리 내어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회장님은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바다나 강이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가 내 팔짱을 끼며 걸어올 때 숨이 멎는 듯했다.

그녀의 가슴이 내 어깨에 살짝 닿았기 때문이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래서 연애할 때는 나이를 먹었건 먹지 않았건 모두 20대의 마음이 된다고 하나 보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는데, 내 심장은 거센 비바람처럼 요동쳤다.



조수석에 앉자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늘 맛난 거 사주세요.”
“응, 그래.”



가는 내내 그녀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는 경기도 가평으로 향했다.

남이섬이 있는 곳이다.



도착하니 11시 40분. 공원에서 손을 잡고 걸으니 새소리가 너무나 곱다.

점심은 소박하게 순두부찌개로 먹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단둘이 점심을 먹어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후 4시가 되었다.



그때 수아가 뜻밖의 말을 했다.
“회장님, 우리… 자고 갈래요?”



나는 물을 들이키다 말고 말문이 막혔다.

그녀도 침묵했고, 나 역시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회장님, 자고 갈래요.”
그 짧은 말 속에는 수천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서 자고 갈까?”
“네, 좋아요.”



우리는 강릉으로 향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강릉 경포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호텔을 예약한 뒤, 식당에 들렀다.



소주를 따르며 수아가 말했다.



“회장님, 저… 많이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세요.

남편이 죽고 처음 만나는 남자예요.

아직 마흔도 안 되었어요.

제 인생을 돈과 바꾸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떠난다고 하면… 언제든 보내주세요. 약속할 수 있어요?”



“응. 많이 아껴주고 사랑할게. 그리고 네가 떠난다면 아무 말 없이 보내줄게.”



나는 목포에서 했던 약속을 다시 떠올리며 말했다.
“입사 후 3년이 지나면 네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줄게.”



수아가 내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회장님.”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히며 건배했다.



그날 밤,
칠십 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30대의 여인과 밤새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떠 보니 그녀가 곁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혼자 백사장으로 나갔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상쾌해졌다.

잠시 후 그녀가 걸어 나왔다.



“같이 백사장 걷자고 그러시지 그랬어요.”
“응, 너무 잘 자길래 안 깨웠어.”




그녀가 내 품에 안기며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우리는 어린 연인들처럼 백사장을 오래 걸었다.



오후에는 강릉의 금은방에 들러 순금 10돈 팔찌를 선물했다.

그녀의 손목에 채워주며 말했다.
“이건 내가 해주는 작은 증표야.”
“고마워요, 회장님.”



수아도 내게 손목시계를 선물했다.

반지는 하지 않았다. 아이들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바다를 마음껏 눈에 담고 서울로 돌아오니 오후 5시였다.


마당을 산책하다 보니 막내딸이 부른다.
“아빠, 식사하세요.”
“응.”




그날 저녁, 큰아들과 둘째, 막내딸, 그리고 나와 수아까지 다섯이서 식사를 했다.

아이들은 우리가 강릉에서 함께 묵고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내가 말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해라. 이것은 아빠가 부탁하는 거다.”
세 아이 모두 대답했다.
“네, 아버지.”



수아도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내 방에서 함께 잠을 잤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언젠가는 수아가 떠날 것이다.

지금은 처음이라 괜찮지만, 함께 지내다 보면 아이들과의 관계도 불편해질 수 있다.

그래서 한 달 뒤,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수아 명의로 마련해 주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그녀가 내 인생의 마지막 여자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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