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고 무너지는 시간들
5년마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까지 몇 명의 대통령을 지켜봤는가.
나는 늘 중립의 입장에서 베팅을 해야 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회사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여야 할 것 없이, 모든 이가 내게 줄을 댔다.
정치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돈 안 드는 선거는 없다.
선거철이 되면 언제나 북한 문제가 등장한다. 북핵 문제.
한 개를 가진 사람보다, 99개를 가진 사람이 더 무서운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를 더 채워서 100개를 만들고 싶은 욕망”
인간의 본성은 늘 그렇다.
나 역시, 더 지키고, 하나 더 쌓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았다.
그냥 지키기만 하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내가 회사를 더 키운들, 아들이 그것을 모두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더구나 정권이 바뀌면, 흠집을 찾아 죄를 만들어낸다.
두 후보 모두에게 베팅을 했다.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가 탄생했다.
보태준 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사람만 성가시게 하지 않으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터졌다.
당시 가수 유씨가 미국으로 콘서트를 가며
한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병역을 기피한 사건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군인 출신이고, 김영삼, 김대중은 미필.
병역 문제로 흔들릴 상황이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육군 병장 출신이었다.
나 역시 당시 일본 시민이라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언론과 정부는 아들의 병역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대한민국 1위 기업의 아들 문제는 매일 방송을 탔다.
기업 이미지도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들은 군 복무를 하기로 했다.
둘째도 문제가 될까 봐,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몇 달 동안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감옥에 있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행히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아들에게는 군 복무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고,
전역 후 다시 회사에서 일 배우라고 했다.
아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수아는 내 비서실로 발령되었다.
대통령의 육군전역과 유승준 사건이 겹치며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그 몇 달 사이, 내 흰머리는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내 가슴이 텅 비는 사건이 일어났다.
2003년 12월, 눈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초희가 술 한잔하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가려던 나는,
그녀가 가게로 오라는 말에 웃으며 향하였다.
식당에 앉아 고기와 술을 나누고 있는데, 초희가 조심스레 말했다.
“회장님… 저 결혼해요.”
하늘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멈춘 듯했다.
침착하려 애썼지만, 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이었다.
“이혼한 유부남, 아이 둘 딸린 사람과 함께,
호주 대사관으로 발령 나서 같이 간다는 것이다”
집도 팔렸다고 했다.
나는 그저, 잘 됐다며 마음속으로 그녀를 보내주었다.
그날밤, 그녀의 집에서 오늘이 지구의 종말인 듯, 뜨겁게 사랑했다.
일주일 뒤, 초희의 남동생이 작은 편지를 전해왔다.
“저희 남매를 거두어주셔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회장님, 건강하세요.”
눈물이 흘렀다.
그날, 남동생도 사직했다.
누나가 하던 식당을 이어받아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20년 가까이 알고 지내던 여인이 떠났다.
눈물은 계속 흘렀다.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나의 여인은 분명 그녀였다.
두 시간이 넘도록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제정신일까?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집과 회사 일에만 몰두했다.
한 달쯤 지나자, 모든 것이 백지처럼 변했다.
죽을 듯한 감정의 고통은 사라지고,
마음은 고요한 바다처럼 평온해졌다.
2003년 겨울을 지나,
2004년 겨울을 보내고 나니,
2005년 봄이 찾아왔다.
지난 겨울보다 내 마음은 더 차가웠다.
그래도 아들과 딸들이 있어 위안이 되었고, 행복했다.
그래서 가족이 최고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분명하다.
나의 자식들이다.
요즘 나는 달리기와 걷기를 많이 한다.
담배와 술도 줄였다.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다.
마당에 앉아 봄날의 하늘을 바라보며 깊이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회장님.”
반가운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