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작은백합

# 기억,시간의 부스러기

by 전태현 작가


ChatGPT Image 2025년 8월 31일 오전 09_24_26.png



눈을 뜨니 새벽 5시이다.


마당으로 나서 담배를 피우며 연못을 보니

잉어들이 잠조차 잊은 채 부지런히 물길을 헤엄친다.




역시 한 시간가량 마당을 거닐었다.

그때 큰아들이 나와 물었다.



“아버지, 일찍 일어나셨네요?”

“응, 잘 잤냐?” “네, 아버지.” 큰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느새 둘째와 셋째도 환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밝은 기운으로 모여드니 덩달아 내 기분도 더없이 좋아졌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큰아들은 내 차를 타고 함께 출근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각자 학교로 향했다.


회장실에 들어서니 초희와 수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과 넷이서 차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초희를 먼저 일어났다.



“오늘부터 계열사 사장들에게 업무보고를 받으러 다녀라. 운전은 직접 하고.”

"네"



아들에게 회사 중형차 한 대를 내주었다.

따로 사무실은 마련해주지 않고 총무실에 두 사람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수아에게는 비서로서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두 사람이 업무를 보러 나가고,

시계를 보니 열 시 삼십 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해 5월 초,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따뜻한 날씨가 기분 좋았다.

집들이는 수행원, 경호원들, 그리고 수아의 부모님과 초희 남매만 초대해 조촐한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수아는 한 달 만에 부모님을 만나는 듯했다.




이 집에는 특별한 것이 있는데, 바로 다섯 마리의 말이 있다는 점이다.

마굿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울타리와 집 주변은 온통 시골 풍경이었다.

예전부터 마당에서 마차를 타는 것을 꿈꿔왔다.

다섯 마리 중 한 마리는 초희의 말이다.



아이들은 이 모든 것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나는 초희와 결혼 같은 것을 할 생각은 없다.



그저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지내고 싶다.

다행히 아이들이 이해해 주어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유월의 장맛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출근 시간은 정확히 지키지만, 퇴근은 오후 세 시 이후 자유롭게 한다.

모든 업무는 오전에 보고를 받고, 나머지는 큰아들에게 맡겼다.




오후에 초희가 집으로 왔다. 내가 오라고 했다.

비 오는 날 마차를 타고 싶었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경주처럼 내달리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마부가 인도하는 대로 천천히 걷는 것이다.

서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한 마리 말이 마차를 끌고 가는 방식이다.



비를 맞지 않도록 위에는 천막이 쳐져 있다.

바람도 불지 않고 마차 타기 좋은 날이라 초희를 부른 것이다.



내가 말을 타본 것은 열다섯 살 때, 통영에서 사유리를 태우고 걷던 시절이 마지막이다.



사실 나는 말을 잘 타지만,

나이가 들어 위험하기에 조심할 뿐이다.

빗방울은 거세진 않지만 제법 굵었다.




테라스에 앉아 있는데 차에서 내리는 초희의 모습이 보였다.

꽃무늬 미니스커트에 샌들을 신은 모습이 순수해 보였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와락 안기며 말했다.

“저 마차 태워 주려고 부르신 거예요?”

“응, 그래. 너랑 마차 타보고 싶어서 불렀어.”




나는 우산을 씌워주고 초희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키 큰 그녀의 하얀 다리가 정말길어 보였다.

마부는 선수 출신이었다.


고삐를 잡고 출발하니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에 빗방울이 살짝 닿았지만,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비가 와서 젖은 흙길이 오히려 더 운치 있었다.

내가 살던 통영에서 많이 보았던 그런 흙길이었다.


초희의 허리를 안고 덜컹대는 마차를 타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 바퀴를 돌고 난 후, 나는 마부에게 고삐를 넘겨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희는 내 허리를 꼭 껴안고 “무서워요”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세 바퀴를 돌았다.



우산을 쓰고 테라스에 앉으니 우리 둘 다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놀다 보니 비에 젖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비에 젖은 초희의 나시 사이로 하얀 브래지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너무나도 선명했다.

남자의 본능일까, 욕망일까. 그렇게 우리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시간은 어느덧 다섯 시를 훌쩍 넘겼다.

내가 “밥 먹고 가라” 하자 그녀가 “네, 회장님” 하고 답했다.

여섯 시가 되니 둘째와 셋째가 돌아왔고,

넷이서 저녁 식사를 마치니 일곱 시가 되었다.



초희는 돌아가고, 여덟 시가 되자 큰아들과 수아가 왔다.

도우미가 식사를 차려주었고,

담소를 나누다 아홉 시가 되니 수아는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아이들 모두 이층에서 생활한다.

일층에서 나 혼자 지낸다.



50평 아파트 여섯 채가 일층에, 또 여섯 채가 이층에 있는 셈이다.

일요일에는 온 가족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

막내딸은 꼭 비키니를 입고 오고, 나는 반바지 수영복을 입는다.

두 아들은 운동을 많이 해 근육질 몸매를 자랑한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다시금 느낀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나의 신념은 변함없다.


세 아이들에게 똑같이 유산을 나누어주고,

운영은 큰아들이 맡는다는 변함없는 소신이다.



그렇게 새집에서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아내는 점점 내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내는 그렇게 기억 저편으로 희미해져 갔다.



2002년 늦은 가을, 새로운 정부의 탄생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