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 주방을 수리하면서 많이도 내다 버렸다
주방 수납장은 오래도록 잊힌 무덤이었던 것
봉합된 문을 열자,
죽은 빛의 부장품이 맹인처럼 눈부셔하며 줄줄이 새어 나왔다
이사 다니면서도 유목민의 마구처럼 기어코 끌고 다녔던
이 빠진 사기그릇, 냄비 나부랭이, 피의 기억이 있는 무딘 칼날,
놋수저처럼 짓눌린 포만감, 먼지처럼 떠다니던 허기까지
그때는 더없이 소중하고 아득했던 것들
가문의 불문율처럼 함부로 내다 버릴 수 없었던 것들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들여다볼수록 바닥이 보이지 않던 사연들
대수롭지 않은 한낮의 기억까지 시시콜콜 다 기록하자면
아마 사막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복음서 정도의 분량은
된다는 것, 되고도 남으리라는 것
저마다 간절한 자신의 무늬를 온몸으로 새겨넣고 있던
이 빠진 식기와 칼은 산 자의 온기가 닿자
미친 듯이 과거의 기억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무덤에서 끌려 나온 미라처럼 가슴이 먹먹해져서
난데없이 문화재가 발굴된 공사 현장처럼 잠시 일손을 멈추고
추억을 복기하기도 했지만
부질없는 짓, 추억의 봉분이 높아갈수록 현실은 더 피폐해지므로
버리는 일이 곧 채우는 일
새로운 산소로 폐를 채워 넣듯이
분가하기 전 철모르던 시절의 나를 버리고
밥상머리에 둘러앉아서 중언부언했던 가족의 전언을
식탁에 묻어있는 밥풀 같은 미련을, 미련 없이 내다 버리자
주방은 비로소 풍선처럼 가벼워졌고,
거기 매달려 있던 추억도 한결 얄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