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연숙 선수의 편지는 안 오고, 나에겐 운명이랄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1 HR 시간에 손 한번 잘못 든 죄로 나를 가두었던 수영부. 그때 나는 물리반, 화학반 이런 공부동아리를 택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전국에서 하나뿐인 실내 수영장에 공짜로 데려간다는 수영반을 찍었다. 선수가 되는 수영부가 아닌 수영반은 특활반이라는 선생님의 설명을 100% 믿은 죗값이었다. 그래서 고2 때 수영부가 해체될 때까지, 에이스 선수로서 수영부에 갇혀 있었다.
오전 수업을 자주 했던 수영부. 공부하고는 일찌감치 담을 쌓은 수영선수들은, 운동부가 해체되자 대학 갈 일이 걱정이었다. 나 역시 공부 실력은 거의 바닥. 기초 영어를 들을 수준이었지만, 겉멋이 들어 핵심 영어반에 등록했다. 교복 배지는 고2인데 그 안에 중2가 들어있던 셈. 그래도 여학생에게 한눈팔 땐 고등학생이었다.
그 당시 여학생을 만날 공간은 교회나 학원뿐이었으니, 거기서 흘끔거리는 일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어려운 살림에 학원을 보내주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눈팔기는 너무나 정신 빠진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을 다짐하던 내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사건이 생겼다. 내 책가방 귀퉁이에서 여학생의 쪽지가 나온 것이다. 1972년 8월 14일이었다. 쪽지는 난생처음 보는 모습으로 접혀있었는데 정사각형에 넥타이가 들어있는 모습 같기도 했고, 종이배 같기도 했다. 아 쪽지를 이렇게도 접을 수 있구나! 번개같이 펼쳤다.
‘저기... 그대 한번 만나요 쭌. 제헌절 5시, 뉴욕제과에서 눈 빼꼼. -옥-’
글씨체는 죽여주게 깔끔 떨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휴 어떤 계집앤지 큰일 날뻔했네, 날짜가 내일인데 못 봤으면 어쩌려고 요기다 넣었지?’ ‘근데 누굴까? 필시 학원 다니는 아이일 건데.’ 나는 마음이 이미 붕 떠버려서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공부고 뭐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울 속의 나에게 말했다.
“너 공부는 어쩌려고 그러니? 아이고, 어쩌고 뭐고 우선 누군지 만나보고.”
나는 너무 좋아서 앞집 누나에게 자랑도 했다.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난나 누누나♬”
[뭐야 말을 해 말을!]
“누나 누나 누나♬ 눈누나~”
[말을 하라니까?]
“나에게도 큐피드를 쏜 여학생이 있다, 이거야.”
[그으래?]
“장난 아니야 쪽지도 이렇게 예쁘게 보냈어. 얼굴도 예쁘겠지? 자 봐봐, 내일이얌.”
[헉, 근데 이거 날짜 지난 거잖아. 제헌절이면 한 달이나...]
“아니 내일이 제헌절인데?”
[내일은 광복절이고 제헌절은 지난달인데 얘는 정신이 있니 없니?]
순간 국화빵 앙꼬가 그렇게 뜨거운 줄 모르고 씹었다가 입안이 홀랑 벗겨진 채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그걸 지금 알려주면 어떡해, 아이고 망했네.”
[야, 제헌절 광복절을 내가 바꾼 거니? 정신 차려 이것아.]
그건 그래. 누나완 하등 상관없는 일이네, 쪽지가 책가방에 한 달이나 있었다구? 내가 그렇게 공부를 안 했구나. 어느 계집앤지 그날 얼마나 기다리다 갔을까. 다음 날 학원에서 꾹 찔러 얘기할 순 없었을까? 그럴 애 같으면 처음부터 쪽지를 택하지도 않았겠지. 아 근데 미치겠다. 누구지?
뉴욕제과에도 찾아가 정신 나간 놈같이 돌아다녔다. 여기 어디쯤 앉아 있다가 바람맞았을 텐데. 뷰우웅신 왜 말을 못 했지? 그러느라 학원 수업도 망쳤다. 망친 학원비를 누구에게 돌려받나...
어느 날인가 쪽지 테두리에 무늬처럼 인쇄된 문구가 눈에 띄었다. ‘운명運命은 인명재천 하늘엔 하나님... 운명運命은 인명재천 하늘엔 하나님 운명運命은 인명재천 하늘엔 하나님.....’ 쪽지를 하도 많이 펴봐서 너덜너덜 보풀이 일었다. 운명(運命)은 ‘명줄을 운전한다’는 뜻이다. 내 운명을 운전하는 이는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