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5시간 사투와 대청봉, 빗속의 단풍 산행
설악은 내게 낯선 산이 아니다.
대청봉만 해도 2023년에는 기세 좋게 봄·여름·가을·겨울 네 번을 올랐고, 2024년에도 세 번 올랐다. 작년에는 비를 맞으며 한 번, 손에 꼽아 보아도 꽤 여러 번 오른 셈. 그러나 칠순도 나이랍시고, 든 태가 보인다. 예전 같지 않은 걸음걸음에 한숨을 길게 뿜어대던 빡센 길.
버스가 오색약수터 들머리에 나를 내려놓은 시각은 새벽 2시 40분. 산 아래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부슬비까지 내려 달빛조차 흔적이 없다. 마치 세상의 불이 모두 꺼진 듯한 밤.
새벽 3시. 헤드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설악의 품으로 발을 들였다.
“이제부터 달빛도 없는 길을 다섯 시간 올라야 한다.”
사진 캡션에 적어 둔 이 한 줄. 그날의 막막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색 코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자비라곤 없다. 급경사의 돌계단이 어쩌면 그렇게 끝도 없이 이어지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벅지는 팽팽히 당기고, 가쁜 숨소리만 산의 정적을 깨운다.
예전에는 산을 오르며 남들을 앞질러 가는 맛에 다니기도 했다. 걸음이 가벼웠고, 추월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 뒤에서 들리던 발소리가 어느새 옆을 스치고, 곧 앞쪽으로 멀어진다. 어린 여대생들까지 가볍게 나를 지나쳐 간다.
부지런히 오르는데도, 가다 보면 산길에는 나 혼자.
적막한 산중에서 어디선가 부스럭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멧돼지일까. 혹시 반달곰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또 이 길은 가게 된다면 친구 하나는 꼭 데리고 올 거라고 결심한다. 특히 밤길은 동행이 필요한데 할 수 없이 혼자가 되어버린 오늘.
짐승을 만나면 달리 방법이 있겠는가. 하늘을 향한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공포를 잊으려 랜턴 불빛과 호흡에만 정신을 모았다. 그렇게 다섯 시간 반. 수직으로 솟은 길과 묵묵히 씨름하며 올라왔다.
8부 능선쯤이었을까. 몸을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도시락을 먹었다. 차가운 밥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든든한 식사가 되어 줬다. 손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던 한 끼,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오전 8시 30분, 마침내 대청 정상석 앞. 그런데 사람이 없다.
공휴일이면 인증사진을 찍으려 길게 줄이 늘어서는 곳. 평일의 정상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젊은 산객들은 이미 내려갔으니, 넓은 정상에 나 홀로 남은 기분. 정상석과 오래 놀 수도 있었는데, 설악의 정상은 오래 머물게 두지 않는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부슬비도 어느새 굵어진다. 결국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칠순의 산객이 이 험한 길을 올라왔다는 사실. 그것도 내 발로 끝까지 해냈다는 사실만 마음에 남기기로 했다.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모델은 빗속에서 제법 고생 중이다.
https://youtube.com/shorts/9vC-JiPnVSc?si=iTEJPN-pJLUCbjMV
사진 찍고 내려오다 몇 번이고 돌아본다. 내려가기 싫은 사람처럼 발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그러나 정상석은 이내 빗속으로 스며들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천불동 계곡도 구름 아래 장관일 텐데,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공사 중인 중청대피소를 지나 봉정암 쪽으로 길을 꺾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잦아든다. 그리고 그때.
붉은 단풍. 혹시 비 때문에 단풍 구경도 못 하고 내려가는 건 아닐까 마음 졸였는데, 봉정암에서 영시암으로 이어지는 계곡에는 가을빛이 환하게 번지고 있었다.
비에 씻긴 단풍은 더욱 선명하다. 붉고 노란 잎들이 물기를 머금은 채 산을 환하게 밝힌다. 셔터를 누르는 손끝에 다시 살아나는 설렘. 힘들었던 오르막은 기억에서 멀어지고, 하산길에는 가을의 색채만 나를 반겨준다.
봉정암에서 점심과 커피를 얻어먹고 영시암을 지나 백담사까지 내려왔다. 길 위의 풍경을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사진으로 담았다. 그걸 담지 못했으면 걸음이 더 무거웠을 것이다.
용대리에서 버스를 타고 사당역에 내리니 밤 10시. 집을 나선 지 꼬박 24시간 만에 돌아온 셈이다.
몸은 천근만근. 심야 산행의 고단함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다시는 이런 산행하지 말아야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눈을 감자 어느새 마음은 다시 대청의 능선을 타고 있다. 편안히 누워 있으니 그렇게 힘들던 코스가 거짓말처럼 희미해진다. 무섭기도 해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길인데. 사람 마음이란 참 묘하다.
나는 벌써 내년 가을, 설악의 단풍 속 대청을 다시 그리고 있었다.
https://youtu.be/mnte8RS1ICk?si=0vwKyuWj6xIqovK5
https://youtu.be/Xi1V1RnPJfE?si=pd_0YI5nki8gDRf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