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칼국수

새벽 별

by 무궁화

새벽 4시 전화벨이 울렸다
남자가 버스 정류장 옆에서 잠을 잔다는 지나가는 사람의 연락이었다
여름의 새벽은 분꽃처럼 환하게 차오른다
부지런하신 분들의 바쁜 걸음걸이도 새벽을 채운다
더 밝아지기 전에 남자를 데리러 가야 했다
큰딸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깊은 잠에 빠졌던 아이는 눈을 비비며 나의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걸었다
새벽하늘에는 아직 잔별들이 남아 있었다
한낮에 더운 온도가 이제 막 식어진 듯 새벽 공기는 맑고 고았다
느티나무 잎사귀들의 서걱서걱 흔드는 소리가 딸과 내가 걷는 발자국 소리만큼이나 크게 새벽을 깨웠다
오늘도 뜨거운 한낮에 여름이 새벽부터 느껴왔다
느티나무 잎들 위로 태양이 내려앉아 시원한 그림자를 만들어 주리라 생각했다
나무 아래에서 자판을 펼쳐놓고 채소들을 파는 할머니들이 겹쳐지는 것을 느끼며 느티나무 밑을 걸었다
느티나무 잎이 떨어져 내 앞길에 내리내리 별빛이 되어 가슴팍에 안겼다
묵묵히 아무 말 없이 걷는 딸에게 말했다

" 엄마와 함께 맞잡고 걷는 새벽길은 먼 훗날 너의 소중한 추억이 될 거란다 "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더해서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하루하루는 한 달을 만들고 한 달 한 달은 일 년을 만들고 지금 너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은 우리의 삶의 한 페이지로 역사가 된다고라고 딸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드문드문 간판 불이 켜져 있는 곳도 있었다
저 멀리 보도블록 위로 비닐봉지 한 장이 어제 낮의 무더위를 이야기해 주듯 뒹굴고 있었다
도시의 가로등 빛은 남자를 쉽게 찾게 해 주었다
버스 정류장 옆에 겉옷을 벗어 느티나무 가지 위에 걸어두고 신발 두 짝은 한 짝은 머리 위, 한 짝은 발아래, 양말은 배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남자는 보도블록 위에서 안방처럼 코까지 골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다행히 지갑과 핸드폰은 곁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지금 같으면 이런 모습을 영상이나 사진으로 남겨두었을 텐데...

나는 딸과 남자를 끌다시피 해서 집으로 데려와 거실 바닥으로 밀쳤다
술에 취한 남자는 무거웠고 여자 둘이 집에서 꽤 떨어진 곳으로부터 데리고 오는 길은 버거웠다
따뜻한 물수건을 가지고 와 손과 발, 얼굴을 닦았다
시원한 물 한 잔을 옆에 두고 소파에 앉았다
몸속에 있는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소파에 잠시 누워 잠이 들었다
근데 갑자기 이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나는 물을 찾는 걸까? 생각했는데...
아니 이게 뭐야?

" 으악 "

비명 소리가 절로 나왔다
냉장고 안에는 양념이 된 돼지고기가 사각 통 안에 들어있었다
긴 삼겹살에 된장과 고추장을 반반씩 섞어 양념에 재워두었던 것이다
이 남자 긴 삼겹살 줄을 손으로 잡고 입안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누런 비엔나소시지가 줄줄이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양념에 재워둔 고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파 조각과 양념 국물이 핏물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되고 과하면 독이 된다더니...
남자는 모든 감각들과 이성을 잃어버린듯했다
그날 이후 나는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마다 킁킁거리면서 음식을 먹는 돼지의 얼굴이 남자의 얼굴 위에 겹쳐 보였다
다음날 남자는 회사에 가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오후에 일어났다
기막힌 것은 새벽에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특히 생고기를 먹은 것은 전혀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황당하기만 했던 그날 새벽에 일어난 일은 큰딸과 나만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며 배를 잡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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