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칼국수

포플러 나무

by 무궁화

결혼을 하자마자 시댁에서 제사를 가져와 지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런 것인 줄 알고 어른들께서 시키는 대로 했다
30년을 한결같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
나는 둘째 며느리였다
막내딸을 임신한 지 4개월쯤이었다
입덧으로 인해 힘들었던 나였지만 새해에 차례상을 차려야 했다
먹지 못해 10kg이 빠졌던 나는 서서 다니는 것마저 어지러워 힘든 상태였다
이 남자 아침부터 큰 정종 한 병을 송두리째 다 마시고는 벼락같은 울림으로 제사상을 단숨에 엎어버렸다
나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남자는 한마디로 정신병자였다
따뜻한 봄날 같은 날씨로 사람을 대하다가도 갑자기 혹독하게 태풍 부는 한 겨울로 변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었다
180도 바뀌는 성격 탓에 나와 아이들은 늘, 항상, 날마다 긴장과 두려움에 매달려 살았다
술은 남자를 괴물로 만들었다
나의 긴 머리를 질질 끌고 거실 바닥에서 빙빙 돌렸다
나는 입덧으로 인해 지쳐있었고 아무런 대항도 없이 묵묵히 당해주어야 했다
내가 반항을 한다거나 같이 싸우게 되면 남자는 나 대신 어린아이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실신한 나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자는 숨어있던 큰 딸을 찾아서 때렸다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말소리에 위층 이모도 아래층 할머니도 걱정을 했다고 하셨다
어린 아들은 옷장 안에 숨어서 입을 막고 겁에 질려있었다
남자는 자기 성질에 못 이겨 핸드폰을 던져 부수었다
그리고 안방에 붙박이 옷장을 주먹으로 세차게 계속 치더니 구멍을 내버렸다
나는 어린아이들 눈에 깨진 구멍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까 염려가 되어서 스머프 그림을 붙여서 시골로 이사 오기 전까지 사용했다
손님들은 간혹 집에 와서 이 그림을 볼 때 가구 이미지에 안 맞는다고 떼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어떤 분은 날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기도 했다
남자가 술에 취해 잠든 사이 큰딸을 데리고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손을 잡고 걸었다
바람이 살짝살짝 목덜미를 스쳤지만 추운 줄은 몰랐다
하늘도 학교 건물도 낙엽 진 나무들도 온통 회색빛으로 나의 삶에 색이 되어버렸다
운동장과 포플러 나무가 우람하게 하늘을 받치고 서있었다 마치 가지를 흔들며 내 어깨를 토닥토닥하는 듯했다
언젠가는 나 역시 이슬처럼 사라져 나뭇잎에 묻혀 흙이 되겠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새로운 생명의 꽃을 피우겠지
내 영혼이 다하는 날까지 한 그루의 포플러 나무가 되리라고 그날을 기다리며 살자고 다짐했다
그때도 큰딸은 마음속에 커다란 미움과 증오의 한을 심어 두었던 것이다
나는 딸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도 회색빛 하늘만큼이나 내 속에 빛이 들어와 앉을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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