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의 상처는 깊었고 오랜 시간 끝에 상처가 아물었다
남자와 나는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낯선 타인처럼 살았다
남자는 날마다 술에 절어 있었고 얼굴은 험상궂게 변화되었으며 그런 남자한테 나는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남자의 목소리는컸고 물건을 사다 나르는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날마다 던지고 깨지는 그런 삶에서 서로에게 상처는 더 큰 상처를 후벼 파고 있었다
꽃이 사라진 나의 마당은 주인 잃은 대지가 되어 다시 말라가고 있었다
이곳에 머물러 있고 싶지가 않아서 몇 벌의 옷과 조금씩 모아둔 돈을 챙겨서 집을 나왔다
마땅히 갈 곳은 없었다
큰오빠는 임파선 암
큰 언니는 유방암
둘째 언니는 갑상선암
서울에 있는 셋째 언니는 위암으로 치료 중이었다
다들 힘든 시기였다
나의 궁핍하고 초라한 생활을 알린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도 위로받을만한 것도 없었다
무작정 택시를 타고 지리산 골짜기에 위치한 고향 집으로 향했다
이날은 살짝살짝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싫지 않은 비였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비는 나의 사연을 안고 씻겨 대지로 묻혔다
내가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 무렵이었는데 앞 산과 뒷산이 모두 시커먼 산들로 귀신들이 검은 머리를 풀어재치고 회의라도 하는 듯 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무섭지는 않았다
택시를 탈 때부터 비와 눈물에 섞여 울었던 나는 어머니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소리 없이 울었다
택시 기사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고향 집에 내려주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 계신 불 꺼진 고향 집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 가슴팍에서 넘실대며 부딪히고 있었다
울음으로도 풀 수 없는 그리움이 어머니 옷소매 자락에 묻어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간 어머니와 아버지의 방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배도 고팠지만 산중의 밤은 깊은 한숨 소리를 내는 듯 온갖 소리가 뒤섞여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다행히 불이 들어왔다
어머니의 옷과 이불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에서 어머니의 냄새가 내 서러움과 고달픔과 그리움으로 묻어나는 밤이었다
늘 받기만 했던 어머니 사랑!
당신의 사랑, 손길, 눈빛 따스한 햇볕처럼 늘 포근하게 감싸주시기만 하셨던 그리운 어머니
언젠간 어머니 앞에서 장난 삼아서 이야기했던 일
슬픔과 기쁨을 세어서 보여드린다면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이 항상 모자란다고 웃으며 얘기할 때마다 그렇게 힘이 들면 고향 집으로 내려오라고 하시던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생각으로 시커먼 앞 산은 무섭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배가 고파 왔다
아마도 그 옛날 어머니의 그리운 음식 생각에서 그러는 듯했다
오래된 김칫독을 열었는데 그 안에는 병맥주 한 병이 들어있었다
숟가락도 이용해 보고 젓가락도 이용해 보며 이리저리 방법을 연구했지만 끝까지 뚜껑을 따지 못해서 다시 그 자리에 넣어두었다
어쩌면 그 병 맥주는 아직도 날 기다리며 그 자리에 있지 않을까 싶다
밤은 깊어지고 뒷산에서는 강하게 바람이 불었고
바스락거리는 바람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머니의 이불 위에 고단했던 몸을 눕히고 누웠다
바람은 밤이 깊을수록 더 난폭하게 불어댔고 나는 살짝 긴장과 무서움 속에서 어머니의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서 몸을 숨겨야 했다
창고 안에서는 쥐들이 나무토막 갉아먹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찍찍거리고 있었다
앞 산이 자꾸만 내 코앞까지 다가와 겁을 주었다
잠을 자는지 마는지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어머니와 아버지 산소에 갔다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 반질 발질 윤이 나는 사과였다
풀이 풍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흙으로 나를 덮어버릴 듯했다
어쩌면 그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다음 생에 만나줄까
계란프라이 같은 개망초가 밤나무 아래 띄엄띄엄 홀로 피어있어서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그렇게 두분의사랑을 내 두 눈속에 담았다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서둘러 집으로 왔다
남자로부터 걱정과 근심, 무서움과 두려움에서 피하지 않았고 나는 나의 일만 해나갔다
꽃들을 그렇게 다 보내고 나서 내 삶에는 큰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부모님께 다녀온 후로는 마음의 안정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그 안에서 견디는 힘이 여물어져야 하듯이 나 역시 새로운 나로 태어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다시 살고자 하는 힘이 내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잘못된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내 삶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변화들에 감각 없는 상처를 새로운 나를 맡기며 가보자
나의 봄을 만들자
그 길은 내가 꽃과 나무를 알아가는 길이었다
부모님 산소를 다녀온 후부터 자연은 나의 편에 서서 위로해 주었고 바람은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밝은 달은 길을 열어 비춰주었으며 흰 구름은 비가 되어 다시 심은 꽃씨에 양분이 되어 피어나게 해 주었다
꽃이 피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자라는 소리를 듣고 나의 손길로 꽃잎에 감각을 느껴 나의 가슴으로 꽃과의 대화를 받아들이는 법을 익혔다
꽃들은 나의 분신 같은 존재로 나에게 삶의 위안과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꽃과 나무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무궁화와 나와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