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이 머무는 온도

태도

by 김바다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말의 내용보다 말이 놓이는 각도에 더 오래 머문다.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어떻게 말했는가가 관계 온도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늦게 배웠지만, 분명하게 배웠다. 특히 거절 앞에서 그렇다. 거절은 관계를 끊는 행위가 아니라 관계를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것을, 시간을 건너오며 알게 되었다.


지난 시절 나는 거절을 결과로만 이해했다.

받아들이거나 밀어내는 선택지 사이에서 빠르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솔직함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거절 그 자체보다 중요한 건 거절에 이르는 태도라는 것을. 진심 어린 존중을 담아 의사를 밝히면, 대부분 사람은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존중받았다는 감각을 통해 물러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한다. 말의 문턱이 낮아질수록 마음의 문은 더 천천히 닫힌다.


태도는 사람의 세계관이 몸에 새겨진 형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투를 선택하는지는 우연이 아니다. 태도 속에는 상대가 타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와 대등한 존재로 바라보는지, 나의 편의에 맞춰 정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지가 스민다. 그래서 태도를 보면 한 사람의 내면과 정체성이 보인다.


말의 방향은 곧 삶의 방향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툼이 없는 삶은 없다.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접촉의 흔적이다. 그러나 다툼 없이 살고자 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불필요한 다툼을 줄이는 쪽을 택한다. 한 번 다툼을 시작하면, 다툴 이유는 쉽게 증식한다. 말의 결은 거칠어지고, 시선은 날카로워진다. 처음에는 분명한 쟁점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사소한 표정과 억양까지 문제로 확대된다. 다툼은 현재의 사건만 다루지 않는다. 과거의 감정까지 끌어와 증거처럼 늘어놓는다.


다툼이 잦아질수록 표현 방식은 변한다.

설명은 줄고 단정이 늘어난다. 질문은 사라지고 결론만 남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다. 듣는 척은 하지만 이해하려고 듣지 않는다. 반박할 근거를 찾기 위해 듣는다. 그렇게 말은 점점 무기가 되고, 대화는 전투가 된다. 이때 서운함은 아주 작은 틈에서 자란다. 말 한마디, 눈길 하나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다툼의 원인을 살펴보면, 많은 경우 시작은 상대방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상대의 말이 불편했던 이유, 그 말이 나를 건드린 지점은 나의 기준과 기대에서 비롯된다. 내가 내려놓지 못한 방식, 고집하던 태도가 상황을 경직시키는 경우가 많다. 나는 종종 옳음에 집착했다.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보다 이해시키고 싶다는 욕망이 앞섰다. 그때마다 관계는 숨을 고르지 못했다.


나의 태도와 방식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선택하는 성숙한 결단이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고, 그 말이 도착한 자리에서 다시 생각하려 애쓸 때, 다툼은 다른 얼굴을 갖는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화로 방향을 바꾼다. 나는 상대의 말 속에서 나와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존중되는 것이다.


귀 기울임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상대의 말을 끊지 않는 일, 즉각적인 판단을 미루는 일, 나의 경험을 보편으로 확대하지 않는 일. 이런 작은 선택들이 관계의 질을 바꾼다. 이해하려는 태도는 표현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부정은 줄고, 긍정의 여지가 늘어난다. 단호함은 유지하되 날을 세우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되 상대를 밀어내지 않는다.


거절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이제 거절할 때 설명보다 태도를 먼저 챙긴다.

나의 한계를 솔직하게 밝히면서도 상대의 요청이 지닌 의미를 인정한다. 그 요청이 가볍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면 거절은 상처가 아니라 경계가 된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선으로 남는다. 거절은 끝이 아니라 조정의 과정이 된다.


태도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오랜 시간 쌓인 습관과 인식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러나 나는 매번 선택할 수 있다. 다툼을 키울 것인지, 이해를 향해 한발 물러설 것인지. 말의 속도를 늦추고, 판단의 각도를 완만하게 조정할 수 있다. 그 선택이 반복될수록 내 안의 세계도 조금씩 정돈된다.


나는 이제 관계를 이기는 대신 지키고 싶다. 말로 증명하는 옳음보다 태도로 드러나는 존중을 믿는다. 태도는 말보다 오래 남는다. 한 사람의 말은 잊혀도, 말이 건네진 방식은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말의 내용보다 태도의 결을 살핀다. 그 결 속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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