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8살때 여름

- 꼭 살려 주세요.

by 만을고옴

때는 서울 올림픽이 개막하기 몇주 전 이야기다.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혜원여중고가 자리하고 있는 언덕 밑에 우리가족은 살았다.

조그만, 방이달린 가게와 한지붕에 우리가족과 2세대의 가족들이 사는 2층 짜리 다세대 주택이었다.

주인 집은 2층이었고, 1층은 두세대가 주택 마당을 기점으로 방이 나있는 집이다.

1층의 화장실 1개로 두세대의 유일한 생리현상을 해결해주는 곳이었고,

또한 옛 시골에서 볼수있는 푸세식 화장실이다.


옛 일화를 들자면, 내가 9살때 즈음에 우리가족은 마당에 새끼 강아지 한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생김새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말 귀여움의 끝판왕 검은색 잡종 검은 강아지였다.

어느날 학교에 돌아와 보니 강아지가 보이질 않았고, 난 이리저리 찾아 다녔다.

몇시간 찾다가 지쳐서 용변을 보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어디서 낑낑 대는 소리가 들려서 아래를 보니,

우리 귀여운 꼬마 검둥이가 고개를 들고 꺼내달라는 듯이 애처럽게 바라 보고있는게 아닌가~~??

다행이 똥통에 똥이 가득차 있고,

그위에 검둥이가 빠져 있어서 난 가볍게 개를 꺼내 들수가 있었다.

그때는 무엇이 더럽고, 지저분한건지 잘 인지 못했던거 같다.

강아지를 꺼내 바로 마당 화장실옆 수돗가에서 검둥이를 씻어주던 해프닝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8살 막 방학 시작한 여름의 새벽에, 갑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깨운다.

그리고 화장실 옆 수돗가에서 얼굴을 대충 씻기고,

옛 1톤 봉고 화물차에 오른다.

운전석에는 아버지, 가운데 좌석에는 형이, 조수석에는 엄마, 그리고 나는 엄마무릅에 올라탄다.

어디로 가는지 도착지도 모른채 그냥 아버지가 운전하시는데로 화물차는 간다.

그때는, 서울 행정구역만 지나면, 포장도로에서 바로 비포장 도로로 바뀐다.

울틍불퉁한 고갯길을 지나, 밖에 보이는 푸르른 자연경관이,

8살 어린 나에게는 경이롭고 신나는 여행의 일부분으로 느껴졌다.

한 3시간 정도 걸렸던것 같다.


지금은 용문역이 생겨 편하게 전철을 이용해서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때의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도착해서 보니 바로 다음날이 외할머니 생신이셨던 것이었다.

외가는 딸 부잣집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막내고 그 위에 이모님 세분 계신다.

큰 이모 집이 용문이었고, 큰 이모집에서 외할머니 생신잔치를 위한 모임이었다.

같은 망우리에 살고있는 둘째 이모랑, 이모부, 그리고 둘째 이모 막내 형,

대구에 사는 대구 이모랑, 이모부, 그리고 둘째 이모 막내 형,

그리고 우리 가족들.

모두가 다 한자리에 모여 웃고 떠들고,

그때는 별로 가진거 없이 풍요롭지 못했지만,

가족과 친인척 사이가 끈끈하고,

행복과 낭만이 넘치는 시절같아 그때가 그리울때가 있다.


지금도 용문은 물맑고,

자연 경관이 뛰어 나지만,

그때의 용문은 정말 천혜의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그때의 작은 논두렁이에는 손만 집어넣어도,

물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미꾸라지, 작은 물고기가 그냥 잡히는 시기였다.

개울 냇가만 가더라도 바닥까지 훤히 비칠정도록 물이 깨끗했다.


형들과 우리는 밖으로 놀러 갔다.

난 그때 곤충에 관심이 많을때였다.

그 중에 잠자리에 관심이 많았던거 겉다.

잠자리 중에 하필 왕잠자리가 눈에 띄였다.


"반드시 너를 잡아주마~!"


왕잠자리가 내주위를 돌며 날 잡아보라고 계속 꼬리치는것처럼 날 유혹했다.

다가가면 날아가고,

날다가도 내 옆쪽으로 다시 날아오고... 날 놀리는 게 당연하다.

계속되는 잠자리의 도발로 인해 꼭 잡겠노라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나는 잠자리를 잡는라 정신줄을 놓는 바람에, 형들의 무리에 이탈하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 홀린듯이 그 왕잠자리만을 쫓아다녔다.

왕잠자리에게 홀린 나는 아랑곳 하지않고 사방으로 뛰어 다녔다.

난 주변을 살피지 않고 왕잠자리만 향한채 달렸다.

용문시내에 있는 단 하나의 포장된 도로, 시내도로를 찻길이란걸 인지하지도 못한채

그냥 마냥 왕잠자리가 날아가는 방향대로 쫓아갔다.

차도에는 차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 차도를 지나친후 전혀 기억이 없다.

의식이 깨어나 보니 서울 청량리의 성바오로 병원이었다.

오른쪽 내 다리는 붕대가 감겨진채, 붕대로 끈을 삼아 매달려 있었다.

그라고 난 아프다며 징징대고 울었다.

오른쪽 다리가 얼마나 아팠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고는 이러했다.

내가 시내 도로를 횡단할때, 주위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차도를 넘어가고 있었단다.

마침 그때, 승용차 한대가 나를 향해 지나가고 있었고, 승용차는 나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진행하다

차에 치였다.

난 그대로 차로 치이면서, 그대로 본넷및 유리에 부딪히며 튕겨져나갔다고 했다.

튕겨져 나서 3미터 이상 공중에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처럼 떨어졌다.

지금까지의 사고 장며을 친형 혼자 바로 코앞에서 목격했다고 했다.

형은 막 울면서, 개울가에 차를 세우고 세차하는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아버지께 사고난 상황을 울면서 설명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차도위로 아무 미동도 없는 나를 발견하고 바로 안았다고 한다.

피 흘린 혈액이 차도 주위를 빨갛게 물들이고,

미동도 없고, 의식도 없는 몸은 체온은 차갑고, 몸은 축 늘어 진채 있었다고 한다.

머리가 찟어지고, 허리등에 살점이 너덜너덜 반쯤이 떨어져있었고,

그냥 사고후의 내몸 자체가 처참했었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직감적으로 내가 죽었을거라고 생각 하셨단다.

아버지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셧다고 했다.

양평의 길병원으로 응급 처치를 마치고, 다행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난 다시 서울 청량리의 성바오로 병원으로 이송이 됐고,

다행이 그때 의식이 깨어났다.

아버지는 그때 계속해서 하나님께 울부 짖으며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제발 살려만 달라고 진심으로 애원하셨다고 했다.

나 때문에 외할머니 생일 잔치를 망쳐 버렸다.

병원에 입원했을때,

아버지는 자주 방문하셨고,

내가 좋아하는 시장표 통닭을 방문할때마다 사오셨다.

사고 당사자 분도 제 입원실을 방문하셨었는데,

과자 박스랑 그때 유명했던 로보트 장남감을 선물로 주셨다.


생전 처음으로 로보트 장난감을 가지게 되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그때 기술로 3단 변신이 되는 로보트였다.

병원 생활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적응하는데도 그리 큰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병원에서 책도 대여해서 읽을 수 있었고, 많은 또래의 환우들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40일 정도가 지나 퇴원을 하고,

외할머니댁을 따로 찾아뵈었다.

반갑게 맞아 주시던 외할머니가,

용문시장으로 인도 하셨다.

용문 시장에 도착 후 외할머니가 옷가게에 들려 옷한벌고 운동화 1켤레 사주셨다.

가슴엔 배트맨 로고가 박혀 있고,

배트맨 밸트까지 포함된 옷이었다.

그때 외할머니가 사주신 옷이 진정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때 난 죽을 목숨이었을지도 모르다.

차에 튕겨져 내팽게쳐진 안타까운 상황에,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에 내가 살아있는건 기적이다.

아마도 그건,

내가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헌신 적인 기도,

친형의 염원이 담긴 기도,

첫째, 둘째, 셋째 이모들의 하나로 뭉쳐진 바램이,

하나님께 닿았을지도 모른다.


군대 막 재대하고 나서 그때의 자동차 사고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눈적이있다.

그때 새로 알게된 사실은 무뚝뚝해 보이는 아버지,

매일 슈퍼마켓에서 과자 심부름 시키던,

동생에겐 무자비한 친형이 그때 만큼은 펑펑 울었다는 걸 알았다.

항상 무심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와 형이지만, 그 눈물이 가진 의미를 알수 있었다.

그때의 그 장면을 머리속으로 상상을 하다보면 눈물이 핑 돌고, 뭉클해진다.

겉으로는 무심한척 보이지만,

가족의 진정한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아직도 나를 살아 숨쉬게 하는 힘의 원천일지 모른다.

그래서 난 행복하고 운이좋은 사람이다.


"사랑해♡~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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