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팔팔 쌀 상회

-The Begining

by 만을고옴

내 나이 7살, 1987년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콘크리트로 포장된 언덕배기 위쪽의 골목길을 따라 빼곡히 옛공동주택들이 모여있다.


점포이름 ' 팔팔 쌀 상회 '


우리 부모님이 처음 쌀장사 시작을 알렸고, 첫 개업식을 했던 곳이다.

요즘의 점포들을 둘러보면 인테리어가 휘황찬란하지만,

그때 그시절의 점포들은

투박한 앵글들이나 나무들을 조합해, 파는 물건만 보이게끔 펼쳐놓고 수기로 적은

가격푯말을 꽂아놓는다.

부산일보 캡쳐

첫 개업식은 분주했다.


교회의 목사님, 신도님들을 모시고 개업 첫 예배를 드리고, 가게 주위의 이웃들에게 첫 인사겸,

잘 부탁드린다는 명목으로 시루떡을 나눈다.


가게에는 1평 남짓한 방이 딸려 있고, 수도 시설도 되어있다.

화장실은 밖에 공용 화장실을 이용하면된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아버지,어머니,형, 나 이렇게 5식구.

1평 방에 다섯명이 자기엔 자리가 텃없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목공에 재주가 있어서,

각목을 가지고 가게 천장과 방안쪽 창을 입구로 해서 다락방을 뚝닥 만들었다.

창 입구 밑 벽면에는 각목으로 사다리를 만들어 오르내리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다락방 벽면과 천장은 도배로, 바닥은 새 장판으로 마감을 하니 정말 안락한 방이 새로 생겼다.

아버지의 나이 30세의 기술이라 하기엔 너무나 아까울 정도로 뛰어났다.

어두운 방안을 환하게 해줄 전구를 천장에 달고, 전기선을 끌어와 스위치를 달았다.

새로 만든 방은 환하게 빛나고, 가게안에는 방이 두개가 생겼다.

다락방에는 할머니와 형이 사용했다.

식사 할 때는 온식구가 부모님방에 내려와 한상을 가운데 두고, 다섯 식구가 둘러 앉아 밥을 먹는다.

가게안 수돗물 하나에,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세수도하고, 발도 씻었다.

부족한 것도 없고, 불편한 것도 없었다.

우리 가족들은 그나마도 만족했다.

목욕은 일주일이나 보름마다 목욕탕에 방문해서 씻으면 되고,

외투와 속옷은 일주일씩 입으면 된다.

아마 독자들이 이글을 읽으면 더럽다고 구역질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딸랑 방이 딸린 가게엔 세탁기는 커녕, 씻을 만한 마땅한 곳을,

아무리 주변을 두리번 보고 눈씻고 찾아볼래도 찾을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서울에서 산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서울살이다.

아버지가 장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방안에 없던 것이 생겼다.

바로 무선 리모컨 달린 컬러 텔레비젼 이었다.

웹상에서 캡쳐

우리집의 문화생활의 시작이었다.

텔레 비젼이 들어오면서 우리 가족은 생활이 좀더 윤택해진 것 같았다.

텔레 비젼 뒤의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린다.

처음 TV속의 사람들의 움직이는 것과 말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게 본다.

TV를 통하여 웃고, 울고, 노래하고 새로운 소식도 알게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우리가족이 서울에 상경하여 처음으로 등록했던 교회는,

하계중학교 운동장을 경계삼아 넓은 잔디밭 언덕위에 자리한 교회였다.

일요일만 되면, 부모님은 아침 일찍이 교회로 출석해 봉사를 하셨다.

어린이부 예배는 늦은 아침에 시간이 정해져 있어,

형과 나는 부모님이 출발한 다음, 조금 있다가 따로 출발했다.

공릉동에서 하계동으로 이어지는 길못엔 옛 철길이 있다.

지금은 철길을 공원으로 조성을 했지만, 그때만 해도 가뭄에 콩나듯이 종종 기차가 다니긴 했다.

공원을 조성한 옛 철길 _웹상에서 캡쳐

집에서 나오면 그 철길을 따라 철길 위를 걸으며 걷는다.

걷다보면, 작은 역이 나온다.

그 역사의 주위엔 꽃들이 아기자기하게 피어있었고, 꽃에 매달린 곤충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역사에서 조금 쉬었다가 다시 철길에 올라 다시 걷는다.

지금은 철길에 올라가면 벌금을 물지만, 그때만 해도 말리는 어른 한명 없었다.

아마 거의 기차가 지나지 않았을 테니깐...

걷다보면, 더러운 구정물이 흘러가는 개천을 지나치게 된다.

지금의 그 개천의 물은 많이 깨끗해 졌으리라.

그렇게 철길을 걷고 또 걷다보면, 교회 근처에 다다르게 되고 어느새 교회에 도착하게 된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잔디밭을 뒹굴고, 방아깨비 잡으로 다닌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의 그런 추억들은 어린 나이에 있을 법한 최고의 낙이 었다.

아버지는 첫 개업의 성과가 좋았는지, 나를 유치원에 등록 시켜 주었다.

유치원에서 생일 파티며, 소풍이며 견학등 남 못지않게 경험했다.

하지만,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이 문제였다.

그때 난 아직 한글을 떼지 못했다.

유치원 겨울 방학동안 유치원에 등원해 원장님과 일대일로 한글을 배우고 깨쳤다.

그때는 내겐 매우 불만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원장님이 나를 위해 그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주신거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유치원 원장님의 헌신으로 1988년 3월 무사히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같은 반 친구를 사귀었는데, 집의 방향이 같아 등하교를 같이 하곤했다.

학교에서 하교를 하고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작은 도랑에 들린다.

도랑은 모래위로 적은 물이 흐르는데, 긴 막대로 모래를 파헤쳐보면 지렁이 들이 꿈틀거린다.

징거러움도 모르는시절 손으로 지렁이를 마구 잡는다.

지렁이를 들고 그친구 집으로 간다.

그 친구 집에가면 작은 닭과 큰 병아리들이, 철장 박스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곳에 지렁이를 던져주면 정신없이 달려와 지렁이를 쪼아 먹는다.

부모님의 쌀가게 사업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개업후 1년이 지난 여름방학 즈음엔 나의 7살 추억을 뒤로하고,

가게를 조금 넓혀 망우동 혜원여고 언덕 아래에 이사하게 되었다.


-다음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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