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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현진 Dec 27. 2023

아름답고 푸른 *자구리 바다

수필

  

   서귀포 송산동 자구리 바다


긴 장마가 끝나고 오래간만에 화창한 햇살이 쏟아지던  일요일 오후, 바다가 보고 싶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도 서귀포 토박이면서도 근래 들어서 바다에 가 볼 기회가 여의치 않았다. 제주도에 살면서도 여름바다를 혼자 가 본 기억이 거의 없다니,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과랑과랑한 여름 햇볕 아래 서 있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삼복더위.. 그서인지 바다가 더 간절했다. 점심때라 배도 고프고 더위 때문에 갈증이 났다. 바다까지 걸어서 가려면 우선 허기진 배부터 채워야 했기에 편의점에서 밀크티 라떼와 빵을 사서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밀크 티 라떼는 내 입맛에 그다지 맞지 않았지만 일단 요기를 해야 했기에 다 마셨다.

막상 바다로 가려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서귀포에 살지만 *놀토메인데다 밖에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성당에 갈 때 외에는 거의 집에만 있는 편이라 길눈도 어둡고 바다에 혼자 가 본 적도 없어서 어디로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무작정 쪽으로 길을 잡아 걸었다.

 이중섭 거리에서 계속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바다가 나오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길을 잡은 것이다.

어쨌든 서귀포에서는 남쪽이 바다이니까.. 아랫길로 내려가다 보면 바다가 나올 테니 말이다. 그렇게 방향을 잡고 이중섭 거리로 향했다. 이중섭 거리도 혼자 와 본 게 무척 오랜만인 것 같다. 예전과는 풍경이 많이

달라져있었다.

 

 이중섭 거리에는 주말 예술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카페와 공방들도 있고 별세계를 보는 듯했다. 잠시 주말

예술장터를 구경했다. 바다에 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오래 구경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주말 예술장터는 성당 다녀오는 길에 시내를 지나 충분히 걸어서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꼭 다시 가 보고 싶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이중섭 거리를 지나 발걸음을 옮겼다.


발길 닿는 대로 아래로 , 아래로  무작정 걸어 내려갔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솔동산을 지나 걸어보지 않았던 낯선 길로 접어들었는데, 유적지 같은 장소와 안내문이 보였다.


 

서귀진성 집수정(集水井; 물을 모아두는 우물)


  서귀진성 수로(水路)

              


   서귀 진지 객사 건물 추정지

 

서귀진 성터와 서귀진 객사 건물터 추정지가 길 양쪽으로 마주 보고 인접해 있었다. 기념으로 사진에 담았다.  길을 건너 오가며 사진을 찍다 보니 역사 탐방을 하는 기분이었다. 서귀포의 역사 유적지를 지나 서귀진성에서 동쪽으로 다시 방향을 잡고 계속 길을 걸었다. 햇볕이 너무 따갑고 덥고 발도 아프고 해서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여기까지 걸어온 게 아까워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몇 분쯤 더 걷다 보니 도로를 사이에 두고

길 건너편 쪽으로 바다가 어렴풋이 보였다. 순간 안도와 함께 기쁨과 설렘이 다가왔다. 길을 건너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시리게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자구리 바다와 섶섬


춤추듯 일렁이는 푸른 바다의 하얀 물보라로 부서지는 파도가 눈에 들어온 순간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자구리 해안이었다.

화가 이중섭이 6.25 전쟁 때 제주도에 피난 왔던 시절 부인과 두 아들과 함께 게를 잡으며 배고픔을 달래고 예술적 영감을 얻었던 그 자구리 바닷가였다.



자구리 해안 입구에 조성된 문화예술 공원 산책하며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자구리 해안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하늘이 바다빛인지, 바다가 하늘빛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섶섬과 문섬, 주상절리도 아름답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바닷가에서 뭔가를 잡고 있는(*바릇잡이를 하는) *삼춘들이 보였다. 삼춘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릇잡이를 마치고 바닷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물놀이하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바다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더위를 식히며 만족해야했다.

서귀포에 살면서도 자구리 해안에 와보지 못했다는게 아쉬웠다. 여름이 지나기 전에 언제 또 올 기회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기 싫어 스마트 폰으로 계속 사진을 찍었다.


어느 정도 사진을 찍고 나서 임재범의 '시사이드(Sea Side)'를 들으며 자구리 해안과 이별을 고했다. 자구리 바다를

바라보며 '시사이드(Sea Side)'를 들을 때 그 느낌은 이루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동이었다.

한여름 과랑과랑한 제주 서귀포의 햇볕에 피부는 발갛게 익을 정도로 타고, 더위에 지치고 땀에 젖은 몸은 녹초가 되었고 발은 퉁퉁 붓고 부르텄지만 그 힘든 여정을 상쇄시킬 만큼 보람된 하루였다.

자구리 바다와 이중섭 거리의 주말 예술 장터, 서귀진성 유적지.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고, 뜻하지 않은 즐거운 경험과 행복을 느꼈던 하루..

이 여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잊지 못할 여름의 추억을 선사한 자구리.  

내 마음은 이미 자구리로 달려가고 있다.



                                                  -2015. 여름         


  *자구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송산동에 위치한 해안경승지로 화가 이중섭이 6.25피난 시절 가족과 함께 게를 잡으며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자구리 문화예술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다.

         

  *과랑과랑: 햇볕이 뜨겁게 내려쬐는 것을 뜻하는 제주어.


  *놀토메: 제주어로 하는 일 없이 놀기 좋아하는 사람, 백수를 의미한다.


  *바릇잡이: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채쥐하는 것을 뜻하는 제주어.


  *삼춘: 제주어로 어르신을 의미하는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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