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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현진 Dec 18. 2023

 천지연의 사랑 이야기

제주문인협회 주최 제주신인문학상 수필 부문 가작 당선작

 

천지연 폭포


천지연의 밤은 몽환적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때문일까. 은은한 달빛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폭포의 물줄기와 비췻빛 맑은 수면 위에 어린 물비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하늘거리는 순백의 비단폭이

드리워진 듯 아름다운 폭포와 계곡 주변의 울창한 난대림(暖帶林)이 이국적인 운치를 더하는 천지연의 밤은 고즈넉하다. 그러나, 그 고즈넉함은 잠에서 깨어난 무태장어의 용트림으로 이내 흐트러진다. 한나절 沼에

숨어 있다가 어둠이 스며들면 얕은 곳으로 나와 먹이를 찾아 유영하는 무태장어의 거대한 그림자를 따라 천지연에 깃든 애절한 사랑의 전설을 되짚어 본다.   


조선조 중엽 당시 서귀포는 서귀진(西歸鎭)이었는데, 이 서귀진 마을에 어여쁘고 마음이 고운 순천이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동네 여러 총각들이 그 처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그중 명문이라는 총각이 순천이를 마음 깊이 연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천 이는 열아홉 살이 되자 부모가 정해준 대로 이웃 마을 법환리 강 씨 댁으로 시집을 가버리고, 이에 순천이를 흠모하던 동네총각들이 망연자실한 것은 당연했다.

특히 순천이를 짝사랑했던 명문이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집을 간 순천이는 시부모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만 순천이를 잊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지내던 명문이는 밤낮 술과

노름과 싸움을 일삼으며 흐트러져갔다.

어느 가을, 순천이는 햇곡식으로 빚은 술과 떡을 마련하고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떠나는데, 명문이가 그 사실을 알고 서귀진 에서 법환으로 이르는 천지연 입구에서 순천이가 돌아가는 것을 기다렸다. 날이

어슬어슬할 즈음에 순천이는 친정집에서 나섰는데 천지연 폭포 바로 위에 이르렀을 때 명문이가 불쑥 나타났다. 명문이는 술기운에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순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미 순천은 시집을 간 처지인 데다 같은 동리에 살던 총각 정도로만 알고 있던 명문이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겁에 질려 오들 오들 떨기만 하던 순천이는 애걸과 협박을 반복하던 명문이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변하며 입가에 비웃는 듯한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고 위기를 느껴 반항했다. 명문이가 누구라도 자신을 방해하면 순천이를 끌어안고 폭포로 뛰어내리겠다고 위협하자, 순천이는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청했다.

그때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아래 천지연 물에서 무엇인가가 솟구쳐 올라오더니 순식간에 명문이를 후다닥 낚아채고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 순간 깜박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난

순천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환하게 밝아 있는 하늘에 한 마리 교룡이 올라가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순천이의 귓가에 자기에게 사랑을 호소하던 명문이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왔다.

하늘로 올라간 교룡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

보던 순천이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을

자기 주위로 돌렸을 때, 반짝이는 구슬이

발 밑에 구르고 있었다. 그것은 교룡이 남기고 간 여의주였다. 순천은 여의주를 가지고 밤길을 걸어 시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누구

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여의주를 몰래 간직하고 있는 순천이 덕분에 모든 일이 형통하자 집안에서나 일가에서는 모두 며느리의 덕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우연히 알게 된 천지연의 전설이 글과 씨름

하느라 홀로 여름밤을 지새우는 내 마음에 젖어 들어 외로움을 적시고 있다.

교룡에 이끌려 하늘로 올라간 명문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 역시 짝사랑의 열병을 지독하게 앓았던 경험이 있기에 짝사랑하는 순천이에게

마음고백 한 번 못해보고 가슴앓이만 했을 명문이가 안타깝고 측은하게 여겨졌다. 한편으로 순천이의 입장에서 보면 동네에서

오다가다 얼굴만 익힌 동네총각이 뜬금없이 사랑고백을 하면서 협박까지 하니 어이없고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만약 순천이가 시집을 가기 전에 명문이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면 두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 을지 모를 일이다.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순천이의 귓가에 사랑을 호소하는 명문이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는 것처럼 내 귓가에도 그리움에 목이 메어 흐느끼는 명문이의 절절한 호소가 맴도는 듯하다. 명문이를 낚아채어 하늘로 올라간 교룡의 환영일까.

물 밑 생명체들을 압도하는 무태장어의

그림자가 물결을 따라 무심하게 흐느거린다.

다가오는 가을엔 천지연 폭포 아래서 가슴 시린 사랑을 꿈꾸고 싶다.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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