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그 순결한 울음
제주 도서관 주최 전도 여성 독후감 공모 가작 수상작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 독후감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 창에 들어 활과 칼을 비추네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驚寒雁陣高(경한안진고)
憂心輾轉夜(근심전전야)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마치 연인을 대하듯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열었을 때
이 시가 눈에 들어왔다.
충무공의 시라면 대부분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한산도가(閑山島歌)’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이라는 시로 운을 띄우고 있다. 곱씹을수록 절절한 심경이 느껴지는 충무공의 시를 음미하며 책장을 걷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년 후인 계사년(1593) 7월, 충무공은 한산도로 본영을 옮긴 지 한 달 만에 전라, 경상, 충청의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고 전쟁은 2년 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이 시기 한산도 수영은 흉년으로 인한 참혹한 식량난과 전염병의 창궐에 의해 수많은 군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군사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암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전염병과 기근에 의해 군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을 공(公)의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했을 것이다.
‘주려서 검불처럼 마른 수졸 6백여 명이 선실 안에 쓰러져 흰 물똥을 싸댔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통제사였다. 부황 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 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
-「칼의 노래」 본문 ‘밥’中-
수군의 최고 사령관인 통제사가 굶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군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하는 공(公)의 마음 또한 편치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으니 근심이 가슴에 가득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을 공(公)의 모습이 아프게 다가온다.
‘칼의 노래’는 즐겨 시청했던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이기도 해서 꼭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드디어 책에서 만난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에 처해진 직후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의 과정을
형상화한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섬세한 심리묘사는 마치 살아있는 충무공을 대하듯 생동감이 느껴졌다.
특히, 공의 셋째 아들 면에 대해 다룬 ‘젖냄새’는 작가의 문학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도 면은 나를 많이 닮았다. 눈썹이 짙고 머리숱이 많았고 이마가 넓었다. 사물을 아래서부터
위로 훑어 올리며 빨아 당기듯이 들여다보는 눈매까지도 나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눈매는 내 어머니의
것이기도 했다. 시선의 방향과 눈길을 던지는 각도까지도 아비를 닮고 태어나는 그 씨내림이 나에게는
무서웠다. 작고 따스한 면을 처음 안았을 때, 그 비린 젖냄새 속에서 내가 느낀 슬픔은 아마도 그 닮음의
운명에 대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칼의 노래」 본문 ‘젖냄새’中-
면이 태어났을 때 공(公)은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이었는데, 면이 첫돌을 넘길 무렵에야 임기를 마치고
고향 아산에 돌아와 아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오래전 큰 조카가 태어났을 때 갓 태어난 조카를 안아본 기억이 있다. 품 안으로 쏙 들어올 만큼 조그맣고
여린 조카를 처음 안았을 때의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막 세상을 접한 조카들을 안을 때마다 다가온 ‘작고 따스한’ 느낌은 늘 새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물며 부모의 마음이야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을 빼닮은 어린 아들이 그 삶마저 아비의 운명을 닮는 것을 감지한 것인지, 아들의 젖냄새에서 닮음의
운명에 대한 슬픔에 젖는 아버지의 마음이 심금을 울렸다. ‘젖냄새’를 읽어내려가면서 공(公)의 품에 안긴
작고 따스한 어린 면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왜병들과 맞서 싸우다 무자비한 칼날에 스러져간 스물한 살의
그 꽃다운 젊음이 포개어져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소금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칼의 노래」 본문‘젖냄새’中-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막내아들의 죽음을 접한 공은 부하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 없어 몰래
소금창고로 들어가 속으로 삭였던 울음을 토해낸다.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한다한들 누가 나무란다고 가마니
위에 엎드려 숨죽여 울다니, 아들의 죽음 앞에서조차 마음 놓고 못하는 공의 애달픈 처지에 가슴이 미어졌다.
‘칼의 노래’에서 만난 이순신은 지금까지 역사물이나 교과서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접해왔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을 정도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한없는 단순성과 순수함을 지닌 인간 이순신으로 새롭게 다가온 것이다.
칼의 노래는 알 수 없는 몸 안 깊은 곳에서 징징징 울어대는 칼의 울음으로 시작된다.
칼의 울음은 순결한 울음이다. 그 울음은 이름 없는 백성들과 전장에서 죽어간 군사들의 울음일 수도 있으며, 전쟁으로 인해 짓밟힌 백성들의 고통을 가슴으로 아파하며 흘리는 공의 눈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칼의 노래는 사랑의 노래이다. 노을빛 서럽던 노량의 바다, 고요히 저물어가는 관음포의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간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칼의 노래」 본문 마지막 편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 인용)’이다.
이순신의 그 무엇이 이토록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치열하게 살다 간 공의 삶을 들여다보노라면 내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