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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와 수필

을큰함으로 다가온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독후감]

by 오현진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제주인으로서, 특히나 제주 4.3의 피해를 입은 유족 집안의 일원으로서 이 책을

대하는 마음은 예사롭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독서대 위에 올려놓은 책을 경건한

마음으로 펼쳐 정독을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며 첫 장을 넘긴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문장부터 가슴에 와 박혔다.

제주 사람들은 읽는 순간 단박에 알 수 있는 제주도 특유의 눈의 질감.

육지처럼 포실포실하고 솜뭉치처럼 내리는 눈이 아니라 뭉쳐지지 않고 띄엄띄엄 내리는 눈...

제주의 성근 눈을 표현한 작가의 이 짧은 문장 하나만으로 제주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온전히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인 경하와 인선의 서사가 주가 되는 1부는 다소 혼란스러운 감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인선의 부모가 겪은 제주 4.3의 아픈 역사가 다뤄지는 2부부터는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몰입하여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감정을 관통하는 단어.. 그것은 '을큰함'이었다.

원통하고 서운한 아픈 마음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제주공항(옛 정뜨르 비행장) 유해발굴과

표선 해수욕장 한모살 학살,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는 행방불명 수형인 유족들이

유해를 찾기 위한 과정들을 묘사한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을큰한 감정들이 북받치며

눈물이 흘렀다. 책을 읽던 도중 휴지로 눈물을 닦고 감정을 추스른 뒤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나의 큰아버지 또한 4.3 당시 경찰들에 의해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은 후 옛 정뜨르 비행장-지금의

제주공항 남북 활주로 북동쪽 지점-에서 총살 당해 돌아가신 지 63년 만에야 유해를 찾았고,

제주 4.3 발발 이후 73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으셨으며 큰어머니는 끌려가서 돌아가신 후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해 행불인(행방불명인)으로 남아 계신 아픔이 있기에 더욱 감정 이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주 4.3의 비극적이고 참혹한 역사에 관한 내용이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는 내내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그리고 정방폭포에서 돌아가신 큰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세상 빛도 보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나의 사촌이 되었을 - 가여운 아기를 비롯한 수많은 인선의 어머니 정심과 인선의

아버지와 외삼촌 같은 제주 4.3 희생자분들 겪었을 감히 형언키 어려운 처절한 고통과 을큰함이

가슴에 스미는 듯하여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눈 덮인 숲의 어둠 속에서 경하가 불꽃을 피워냈을 때, 그 불꽃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 끝에서

희망으로 이끄는 빛이 되어 위안을 주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책을 덮은 후에도

헤아릴 길 없는 먹먹함과 제주 4.3의 역사가 국내를 벗어나 전 세계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게 해 준

작가에 대한 감사함에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정독을 마치고 나니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영문도 모르고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가족의 유해나마 찾기 위해 평생 외롭게

몸부림을 치며 버텨온, 사랑하는 이의 티끌만 한 흔적이라도 찾기 전까지는 결코 작별할 수 없는 유족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고, 잊혀서도 안 될 아픈 역사의 비극.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언젠간

우리 손으로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고 치유해야 할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우리의 기억.

작별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 '작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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