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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현진 Jan 27. 2024

마매기 동산의 추억

수필



오랜만에 중학교 때 앨범을 꺼내 들춰보았다. 빛바랜 기억 속의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며

감회에 젖었다. 마매기 동산길을 오르내리며 꿈을 키우던 학창 시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마매기는 지형이 말의 잔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마맥(馬脈)’이라고 했는데, 이 한자말이 제주어로 ‘마매기’가 된 것이다.


마매기 동산에 위치한 학교까지 등교하려면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신작로로 포장된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은 동산길이었지만, 잔병치레로 몸이 허약했던 내게는 첩첩산중의 아득한 고갯길처럼 느껴졌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빠올 만큼 체력이 약한 탓에 마매기 동산을 오르내리는 등하굣길은 고역이었다. 그래도 낮에는 길가의 정겨운 과수원 돌담과 바람에 실려 흐르는 밀감향기에 위안을 얻고 수풀 속에서 탐스럽게 익어가는 산딸기를 따먹기도 하면서 걷다 보면 어느새 동네 어귀에 다다르곤 했다. 그러나, 중3이

되어 야간자율학습을 받게 되면서 밤길을 걸어 하교하게 되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긴 마매기 동산길은

미지의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마매기 동산길은 학교를 중심으로 *서카름(서가름)과 *동카름(동가름)

양 방향으로 두 갈래 길이 있어서, 같은 마을 아이들끼리 등하굣길을 같이 다녔다. 

인가가 거의 없어 호젓하고 외진 산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나면 같은 서카름 아이들과 어울려 길을 내려가곤 했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교실에서 나가면 먼저 나간 아이들이 저들끼리 내려가 버려서 항상 빨리 챙겨 나가야 했다. 병약한 데다 성격도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나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얘기라도 나누고 가까이 지내는 아이들은 대부분 동카름 아이들이라 늦은 밤 하굣길에 두려움을 달래며 같이 길을 걸어가 줄 수 없었다.

먼저 나가는 아이들한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밤길이 무서우니 같이 가자고 부탁하면 될 일을 그 한마디

조차 못할 정도로 소심했다. 친하지도 않은 아이들에게 부탁하기도 그렇고 선뜻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선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하굣길에 나서게 되었다. 다급하게 가방을 챙겨 교문을 나섰지만, 이미 같은 서카름의 여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길을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내려가지 않은 여학생들 몇이 보였으나 모두 동카름 방향으로 가는 아이들이었다.

어두컴컴한 밤길을 혼자 내려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고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한 아이가 같은 서카름 방향으로 내려가는 남학생들이라도 따라가라고 내게 이르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남학생들과는 거의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지내던 때라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 가는 것

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그 남학생들을 뒤따라갔다. 그날따라 달빛조차 없어 길을 걷는 내내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동굴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간간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웅웅 거리는 풀벌레 소리마저 음산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검은 형태만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나무들과 바위들이

기괴한 형상으로 다가와 머리끝이 쭈뼛 서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저만치 앞서가는 남학생들은 내가

자기들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왁자지껄 떠들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길이 워낙 구불구불해서 커브를 돌 때마다 남학생들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행여 그들을 놓칠까 봐 겁이 나서 얼른 속도를 높여 쫓아가곤 했다. 그러다가 책가방을 멘 그들의 뒷모습이 멀찍이 보이면 안도하며 다시 간격을 유지했다.

그렇게 밤길을 걷는 내내 두 손을 모아 쥐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에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사실 기도라기보다는 어둠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무사히 집에 갈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었다고 하는 게 맞지 싶다. 마침내, 동산길을 거의 내려왔을 무렵 인가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네 어귀에 다다랐다는 의미였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던 내게 위안을 주었던 그 따뜻한 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밤길은 무서웠지만 그때의

두려움도 이젠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지나간 추억을 그리며 앨범을 넘기다가 문득 한 남학생의 사진에 눈길이 머물렀다.

당시 우리 반 체육부장이었던 H였다. 다부진 체격에 서글서글한 인상이 선해 보이는 H는 구릿빛으로 그을린 가무잡잡한 피부와 쌍꺼풀이 없는 밋밋하지만 남자다운 강한 눈매를 지닌 까까머리의 선머슴 같은 아이였다.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그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운동신경이 좋았다. 내가 H에게 끌린 것은 바로 운동을 잘하는 것 때문이었다. 당시 잔병치레를 많이 한 탓에 또래에 비해 허약했던 나는 체육시간에도 운동장 한번 뛰어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친구들이 달리는 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희멀겋고 비실비실하게 생긴 아이들 보다는 공부는 좀

못하더라도 남자답게 듬직하고 운동 잘하는 아이들에게 더 관심이 가고 마음이 끌렸다.  H는 축구도 잘하고 배구도 잘했다.


열다섯이 되던 해 4월의 어느 오후였다.

그 무렵은 86 멕시코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었고, 우리나라가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낸 터라 축구열기가 어느 해 보다 고조되었던 시기여서 어디서건 공만 있으면 축구경기가 벌어지곤 했다. 나도 그때

축구에 흠뻑 매료되어 축구경기만 있으면 자다가도 일어나 경기를 볼 정도였다. 학교에서도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에 종종 반대항 축구시합이 벌어졌다. 그날도 방과 후에 우리 2반과 라이벌이던 1반이 축구 시합을 했는데, 남학생들은 경기를 뛰고 여학생들은 운동장 한 편의 응원석에 자리 잡고 앉아 반가를 부르며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우리 반이 먼저 한 골을 넣어 앞서갔으나 곧 1반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응원을 하던 우리 반 아이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정도로 기가 죽을 우리가 아니었다. 운동장의 모래 먼지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뛰고 있는 남학생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우리는 거의 악을 쓰다시피 '아리랑 목동'을 부르며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우리의 응원에 힘을 얻었는지 후반전이 되자 우리 반이 다시 경기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마침내, 경기 종료직전에 H가 멋진 결승골 작렬시켜 2:1로 우리 반이 승리를 거머쥐었고 우리는 운동장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질렀다. 한 달 후, 스승의 날 행사로 치러진 체육대회에서 반대항 축구경기가 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결승까지 올라간 우리 반은 3반을 상대로 역전승을 거두어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정작 H가 공식적으로 활동한 운동부는 배구부였다. 학교 운동부에는 축구부가 없었고 배구부와 탁구부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H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바로 배구부에서 훈련할 때였다. 

아마 방과 후였던 것 같은데 운동장을 가로질러 지나다가 우연히 배구부가 훈련하는 것을 잠깐 본 적이 있었다.

반짝이는 여름햇살 아래 타이트한 유니폼 반바지를 입은 H의 모습은 야외 배구 코트에서 훈련하느라 땀과 먼지에 뒤범벅이 되었지만 싱그러웠고, 잠시 가슴을 설레게 했다. 바람이 스치듯 아주 짧은 순간의 작은 설렘이었다.


 H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낡은 흑백사진 속의 H의 얼굴은 여전히 앳되고 우직한 선머슴이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제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으려나.

혼자 두려움에 떨며 밤길을 걸어 내려갔던 그날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본다. 그때 앞서가던 남학생들 중에 

H도 있었을까. 만약 H가 있었다면 그 어둠 속의 마매기 동산길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덜 했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졸업앨범의 마지막장을 넘기고 나니 주마등처럼 스치는 학창 시절의 추억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와 가슴이

뭉클해진다. 잠시 감상에 젖어본다.

누구에게나 가슴에 품고 있는 푸르른 청춘 시절의 첫사랑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게는 가슴속에 품고 기억할 만한 첫사랑이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 내게 첫사랑에 대해 묻는다면 딱히 이렇다 하게 할 얘기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설렘의 기억에 대해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지난날 마매기 동산에서 한줄기 바람이 스치듯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슴두근거리는 설렘의 감정을

느꼈던 추억이 있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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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카름: 위미마을의 서쪽 위미1리를 이르는 명칭.


 ‘카름’은 가르다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위미 1리와 2리를 서카름과 동카름으로 나누어 불렀다.

 현재는 1,2,3리로 구분되어 있다.  


 2) 동카름: 위미마을의 동쪽 위미2리를 이르는 명칭.


 


                                                                            -2009. 9.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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