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현진 Jan 27. 2024

가슴에 내리는 비(雨)

수필





서른다섯까지만 해도 가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부드럽게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결과 시리토록 투명한 10월의 높고 맑은 하늘,

타는 노을빛처럼 제 몸을 태우듯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이 내 감성을 더욱

풍부하고 센티멘탈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른다섯을 넘기면서

그렇게 좋아했던 가을이 내 마음에서 멀어져 갔다. 해마다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던

가을의 낭만 대신 내 안에는 깊은 고독감(孤獨感)만이 자리를 차지하였고, 해가

갈수록 고독(孤獨)은 더욱 깊이 내 가슴속에 침잠(沈潛)하며 나의 영혼을 옥죄었다.

사무치는 외로움에 한없이 울고만 싶은 이 밤, 프랑스의 시인 베를렌느의 詩 한편이

비(雨)가 되어 내 가슴을 적신다.



        내 가슴에 조용히 비가 내리네

        마을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속에 스며든

        이 우울함은 무엇일까


        땅과 지붕 위에 내리는

        부드러운 빗소리여

        우울한 가슴에 울리는

        오 비의 노래여


        병든 이 가슴에

        공연히 비가 내리네

        오 뭐라고, 배반이 아니라고

        이 슬픔은 이유가 없네


        이유를 모르는 건

        가장 나쁜 고통

        사랑도 증오도 없지만

        내 가슴은 고통 투성이네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 베를렌느-



Kenny G가 연주하는 트럼펫 곡(曲) ‘Forever in Love'의 서정적인 멜로디가

베를렌느의 詩와 함께 어울려 내 감성을 흔들며 가슴을 후벼 판다. 지금 이 순간,

뜨거운 블랙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면 좋으련만. 북창(北窓)을 스치고 지나가는

밤바람이 스산하다.


따지고 보면 이런 우울한 증세가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가을마다

어김없이 내 안을 파고드는 고독과 우울은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와 원인이

있는 법이다. 서른여덟 해를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가슴을 뜨겁게 달굴

만큼 열정을 품어 본 적이 있는가. 절실하게 삶의 변화를 바라면서 정작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을 해 보았는가라고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그러나, 그 물음에 나는 차마 대답할 자신이 없어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숙이고 도리질을 할 뿐이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가도록 남들처럼 치열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사랑이든 일이든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이 세월만 축내고

있다는 자괴감(自愧感)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가을 내내

고독과 우울에 얽매어 침잠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독과 우울을 이겨내기 위해 나는 은빛 돌고래 떼를 상상한다. 

찬란한 여름 햇살 속에 짙푸른 바다 물결 위로 날렵하게 솟구치는 돌고래 떼의 싱그러운 

은빛을 떠올리면 나를 옥죄던 우울의 그림자가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듯해서 기분이 한 결 

밝아지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다. 시원스레 물살을 헤치는 은빛 돌고래 떼처럼 꿈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이제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내 가슴에 내리는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있다. 오늘밤도 어쩔 수 없이 고독을 이불 삼아 덮고 잠을 청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나는 더 이상 고독에 끌려다니지 않을 것이다.

내 안을 차지했던 고독과 우울은 이미 은빛 돌고래에게 자리를 내주고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귀여운 돌고래여! 너의 눈부신 비상으로 내 가슴에 내리는

비가 그칠 수 있기를…….


 


----------------------------------------------------------------------------


 


 


* 베를렌느(Paul Veraine;1844~96): 프랑스의 시인.

               1866년에 처녀시집 <사튀르니앙 시집>을 간행하였으며, 1870년 마틸드 모테와 

               결혼했으나 과음과 천재소년 시인 랭보와의 교제로 가정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끝내 아내를 버리고 랭보와 함께 영국과 벨기에 등지를 방랑하다가 1873년에 

               권총으로 랭보를 쏘고 몬스 감옥에서 2년 동안 복역하였다. 그때 가톨릭으로 귀의하여 

               그의 생애의 걸작이라 하는 <예지>(1881)의 시상을 얻었다. 

               만년에는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나 가난과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다가 매춘부였던 

               정부의 거처에서 생을 마감했다.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 이 詩는 베를렌느가 1872년에서 다음 해에 걸쳐 친교를 맺어온 나이 어린 

                            소년 시인 랭보와 더불어 영국과 벨기에 각지를 유랑하는 동안에 쓰였다고 한다.

                            1874년에 베를렌느가 권총으로 랭보를 쏘아 부상을 입힌 사건으로 인해 벨기에의 

                            몬스 감옥에 갇혔을 때 간행된 시집인 <언어 없는 연가>에 수록되어 있다.


 


                                                                                      -2009. 8.28.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