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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와 수필

사월, 붉은 동백

[수필]

by 오현진


사월도 어느덧 중순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바람이 차다.

제주의 사월은 언제나 먹먹함으로 다가오는 계절이다. 지난 4.3 희생자 추념일에 부모님과 함께 4.3 평화

공원에 다녀왔다. 작년에 궂은 날씨 탓에 평화 공원에 가지 못한 것이 아쉽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뵙지 못해 죄송해서 올해는 꼭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4.3 추념식에 갈 때는 아침 7시 30분까지 주민센터에 유족분들이 모여서 버스를 타고 함께 4.3 평화 공원으로 가기 때문에 집에서 걸어서 주민센터까지 가려면 새벽에 일어나 준비해야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나로서는 적어도 새벽 5시~5시 반까지는 일어나야 여유 있게 챙겨 나갈 수 있어서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큰아버지를 뵈러 간다는 생각을 하면 게으름을 피울 수없었다. 전날밤에 미리 입을 옷과 준비물을 챙겨두고 시계 알람을 맞춰놓은 덕분에 늦지 않게 일어나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부모님과 함께 주민센터까지 걸어가는데 예상보다 날씨가 쌀쌀했다. 주민센터에 도착해 직원이 인원 확인을 한 후 버스에 올라 제주 4.3 평화 공원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다시 인원을 확인하고 명찰을 나눠주었다. 8시 반에 제주시 봉개동 4.3 평화 공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4월인데도 이곳 4.3 평화 공원은 한겨울이었다. 내복을 입고 겨울 코트까지 입었는데도 추워서 덜덜 떨렸다. 머리도 시리고 귀와 뺨이 얼얼해서 모자를 챙기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귀도리라도 챙겨 올 걸 그랬다. 자꾸 기침이 나서 급한 대로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어머니가 주신 마스크를 착용하니 그나마 한 결 나았다. 추념식 전에 행불인 표석이 있는 곳에 가서 큰 아버지와 큰어머니께 제를 올리고 인사를 드렸다. 2년 만에 뵈니 만감이 교차했다. 화사하게 벚꽃이 만개한 벚나무들과 붉은 동백꽃들이 활짝 핀 동백나무들의 가지 사이로 큰부리 까마귀들이 날아다니며 울어대는데, 그 울음소리가 가슴에 먹먹하게 파고들었다. 제주에서 까마귀는 육지에서와는 달리 영물로 여겨진다. 제주 설화 속에서 까마귀는 저승 명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제주 속담에도 친근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4.3 평화공원에서 만나는 까마귀들은 두렵지 않고 마치 4.3 영령들을 위로하고 지켜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추념식장에 가기 전에 봉안관에 들러 제단에 향을 피우고 제를 올린 후 큰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추념식장에 도착해 보니 4.3 유족 단체들에서 준비한 천막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봉사자분들이 차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중 부모님과 나는 4.3 행불인 유족 협회 천막에 들어가 봉사자들이 나눠주는 차를 받았다. 천막에서 나와 추념식장에 가서 의자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자 추위가 한 결 가시고 몸이 노곤해지는 듯했다. 식전 공연이 끝난 후 4.3 희생자 추념식이 시작되자, 10시에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4.3 영령들을 위한 묵념을 했다. 올해는 사이렌 대신 열 번의 종소리를 울리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사이렌 소리에 트라우마가 있는 희생자분들과 유족분들을 배려하기 위해 바꾼 것이라고 한다. 올해 77주년인 제주 4.3은 탄핵 정국 속에 맞이하여 더욱 깊은 먹먹함과 을큰함이 밀려들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 연대의 제주 출동거부로 인해 일어난 여순 10.19 사건 때 여수와 순천일대에 최초로 내려진 불법 계엄이 제주도로 확대되어 제주 중산간 일대에 초토화 작전으로 수만 명이 학살된 4.3의 비극. 당시 계엄이 불법인 이유는 계엄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계엄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2024년 12.3 비상계엄 당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있었던 터라 책에서 접했던 계엄을 현실로 목도하면서 제주 4.3이.. 광주 5.18이 또다시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형언키 어려운 공포감과 두려움에 휩싸였었다. 헌재의 탄핵 선고를 하루 앞두고 맞이한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사월의 붉은 동백꽃이 유난히 시리게 다가온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마침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어

2024년 12.3 계엄을 일으켜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던 윤석열은 파면되었다.

주권자인 시민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지켜졌다.

어두운 밤은 지나고 새 시대의 새로운 희망의 아침이 다가오기를 기대할 수 있음에 기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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