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하고 뭐 먹고 사나요
전문대에 입학했을 때,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애프터이펙트, 프리미어 등
툴 중심의 수업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1학년 내내 기술을 익히는 데 급급했고,
솔직히 말하면 따라가기에도 벅찼다.
무엇을 왜 만드는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저 잘 다루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정신없이 달렸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었을 때,
교수님이 던진 질문 하나가 남았다.
“왜 이걸 만들어야 해?”
1년 동안 기술을 익히느라 숨이 찼는데,
갑자기 ‘왜’에 대해 묻다니.
그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을 본질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졸업 시즌이 다가올수록
이 질문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내가 만든 디자인 속에서 살고 싶은가.
졸업 후 회사에 들어가자
“예쁘게 만들었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순간들이 늘어났다.
내가 만든 것들에 대해
왜 이런 설정인지,
왜 이런 흐름인지,
설명하고 상대를 납득시켜야 할 일이 많아졌다.
내가 맡았던 분야는 영유아 콘텐츠였지만,
타깃 연령이 높아질수록
단순한 시각물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깊이는 더 중요해졌다.
연차가 쌓이고 관리자가 되면서
그 책임은 더욱 커졌다.
후임과 파트너들에게
예쁘고 매력적인 것도 물론 중요했지만,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그 시야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그래서 내가 바라보는 방향을
그들도 함께 바라보고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해야 했다.
프로젝트는 같은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들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과가 잘 나오고,
주변의 인정도 받으며
내가 중심에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무렵,
회사는 갑작스럽게 부도가 났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 경험은 나를
아주 조용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겸손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회사를 나와
나만의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가 찾아왔다.
AI의 폭발적인 성장이다.
AI는 순식간에 그림을 만들고, 움직임을 만들었다.
어쩌면 내가 며칠 고민하던 장면을
몇 초 만에 만들어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솔직히 두려웠다.
“내가 하는 일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고민 끝에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AI는 형태를 만드는 데는 탁월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는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애니메이션과 아동용 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나 완성도가 아니라,
‘이 이야기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AI는
내가 어떤 세계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을
오래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무언가를 더 잘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연결하려고 한다.
애니메이션과 아동용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 가장 중요한 자산은
툴이나 기술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경험과 시선, 그리고 메시지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잘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마음이 가라앉을 때도 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 그렇다.
일이 곧 나의 계급처럼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직원 하나 없는 회사에서
집에 틀어박혀 혼자 일하다 보면
괜히 세상에서 조금 밀려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날들 속에서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 하나가 나를 붙잡았다.
사람은
1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10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이었다.
그 문장은
이상할 정도로 정확하게 나를 찔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마음속에는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있었고,
그 밑바닥에는
결국 남들보다 우월하고 싶다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꽤 많은 것을 비교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생각을 조금 비워보기로 했다.
오전에는 회사 일을 하고,
오후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의외로, 좋았다.
단골손님이 많은 숨은 맛집 같은 곳이었고,
사람들은 따뜻했고,
가끔은 팁도 받았다.
그럴 때면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 나 아직 운이 있구나, 하고.
지금 당장의 이 시간이
디자인이나 애니메이션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급하지는 않다.
지나고 나면
분명히 알 길은 생길 거라는 감각이 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생활의 리듬,
다양한 표정과 말투,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이야기와 캐릭터가 되어
작품 속 어딘가에 스며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는 이제
너무 앞서가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다.
너무 자만하지도,
너무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도 않으면서.
들에 핀 하나의 들풀처럼
눈에 띄지 않아도 된다라는 느낌으로.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내가 서야 할 자리,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기회가
조용히 찾아올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