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많아진 시대의 창작자는 어떻게 사나요
나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그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하지만 영상물이나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일은 다르다.
작품을 만든다는 말은 곧 장비와 시간, 그리고 어느 정도의 각오를 의미했다.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쉽게 할 수 없고,
잘 그리려면 오래 배워야 했으며, 혼자 하기에는 벽이 높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림은
작품으로 만들기에는 여전히 장벽이 높은 일에 가까웠다.
요즘은 그 장벽이 분명히 낮아졌다.
머릿속에만 있던 이미지를 말로 풀어내면 형태가 되고,
스케치가 부족해도 여러 방향을 빠르게 시도해볼 수 있다.
완성도 이전에, 끝까지 만들어볼 수 있느냐의 문제가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건 분명히 좋은 변화다.
그림을 좋아하지만 망설이던 사람들에게
AI는 문을 열어준다.
나 역시 그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1인 제작사로 작업을 하다 보면 늘 인력의 한계를 느낀다.
예전 같았으면 직원을 고용하거나 외주를 맡겼어야 할 일들을,
지금은 AI에게 일부 힘을 빌린다.
이건 누군가를 배제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당장 고용하지 않아도 작업을 굴릴 수 있는 선택지가 생겼다는 의미에 가깝다.
AI는 내 옆에 앉아 있는 보조 인력 같기도 하고,
여러 버전을 빠르게 꺼내주는 테스트 파트너 같기도 하다.
효율은 확실히 올라간다.
시간은 줄고, 시행착오는 빨라진다.
혼자서 기획하고, 만들고, 수정하고, 다시 실험할 수 있다.
이 점에서 AI는 분명 1인 창작자에게 기회다.
나에게도 그렇다.
그런데 동시에 마음 한편이 편치만은 않다.
내가 AI로 해결한 일 하나가
예전에는 누군가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내 작업이 빨라진 만큼, 누군가는 기회를 잃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AI를 바라보는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
이 도구는 분명 진입장벽을 낮춰주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지금의 AI는 특히 기획을 하는 사람,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그런 사람에게 AI는 손과 발이 되어 준다.
반대로 지시받아 실행하던 역할은 가장 먼저 흔들린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구조가 고착될까 봐 걱정이 된다.
소수는 AI를 활용해 더 많은 걸 만들고,
다수는 AI 때문에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드는 사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AI를 외면할 수는 없다.
이미 와버린 변화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상과 그림을 작품으로 끝까지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만한 현실적인 도구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AI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도, 완전히 경계하지도 않은 채
조심스럽게 함께 쓰는 쪽을 택하고 있다.
방향은 여전히 내가 정한다.
왜 이 장면이 필요한지, 어떤 감정을 남기고 싶은지는 내가 선택한다.
AI는 효율을 높여주지만,
무엇을 만들 것인지를 대신 결정해주지는 않는다.
아마 이 불편한 질문들은 앞으로도 계속 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변화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기보다는,
어디에 서 있는지 자주 확인하며 걷고 싶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영상과 작품을 만드는 1인 제작자로서,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