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독일 이민이야기 1 - 연이은 취업의 실패

모르는 게 약이다.

딱 3년 전이구나, 이곳에 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게. 머나먼 이국땅, 언어도 문화도 다른 타지에서 살아가는 게 어떠한 것이란 것을 알았다면 시작할 수 있었을까? 결혼생활을 모르고 결혼을 하는 것처럼, 육아를 모르고 임신을 하는 것처럼,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축복이기도 하다.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던 독일로의 이민 이야기, 이제부터 하나씩 풀어볼 예정이다.



이번에도 또 불합격.

4년 전 어느 날, 이날은 공무원 시험 합격 발표날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결과는 불합격. 합격점수가 평균 85점인데, 남편의 평균점수는 80점이었다. 총 7과목의 시험에서 딱 한 문제씩만 더 맞혔으면 합격이었다.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공부한 것이니, 합격점수에서 평균 5점이 부족한 거면 엄청난 성과였다. 여느 고시생처럼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남편과 나는 동갑내기. 우리는 24살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26살에 첫 아이를 가졌었다. 당시 32살이었는데 벌써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어깨에 지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공부를 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아빠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두 아이와 아내가 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들과 실컷 놀아주고 집안일도 돕고 싶지만 몸은 마음 같지 않다. 미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자리에 누우면 어느새 다음날 아침이 되어있다. 하루가 밝으면 또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일상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이런 수고와 노력을 누가 알아주랴. 결과는 오직 점수로만 말하는 것을.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한참을 침울해하던 남편이 어렵게 말을 꺼낸다. 서울로 공부하러 가고 싶다고. 당시 우리는 시댁 근처인 청주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족 옆에 있으면 마음도 흐트러지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집중하기가 어려우니, 독립된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몰입해서 공부해보고 싶다고 했다. 어중이떠중이로 공부하면서 장수생의 길로 가기보다, 당분간은 서로 힘들겠지만 공무원 시험 합격 후의 밝은 날을 바라보며 짧고 굵게 고생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거였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아니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내조로 지원사격을 해줘야 하는 거지만 흔쾌히 그렇게 하라는 대답이 나오진 않더라. 서울에 올라가서 공부하게 되면 일단 고시원에서 생활해야 하고, 공무원 학원도 다녀야 한다. 고시원 방값에, 생활비에, 학원비까지 하면 한 달에 적어도 남편 앞으로만 100~150만 원은 더 들어가야 한다. 지금까지도 남편이 공부하는 탓에 시어머님이 두 아이들을 봐주시고, 내가 저녁에 과외하러 다니면서 대부분의 생활비를 벌었었다. 남편을 서울로 보내려면 과외를 두세 개나 더 뛰어야 한다. 시어머님도 적지 않은 연세에 손주들 돌보시느라 건강이 많이 약해지셨는데, 고생하신 값으로 한 푼도 드리질 못하면서 더 부탁할 생각을 하니 한없이 죄송했다.

게다가 남편이 서울로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 전에도 금융감독원에 입사하기 위해 1년 정도 고시원에 살면서 시험공부를 했더랬다. 그때도 아슬아슬하게 1차 서류, 2차 시험까지 합격하고 마지막 3차인 면접에서 떨어졌었다. 2차 시험까지 10명을 뽑아놓고, 그중에서 최종 7명을 뽑는 면접시험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최종 면접에서 3명만 떨어지는 것이었는데, 우리 남편이 떨어지는 3명 안에 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었다. 그때 탈락의 고배의 쓴 잔을 마시고 그 충격으로 인해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폐인 생활을 했었다. 얼마나 고되고 외로운 길인지를 한번 경험해 봤기 때문에, 남편도 나도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결정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했을 뿐이다. 그렇게 남편은 짐을 싸서 서울로 갔고, 나는 독박 육아와 생계를 떠안았다.



다음 이야기> 독일 이민이야기 2 – 재도전을 위해 서울로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