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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호 Nov 11. 2021

미련하대도 로맨티시즘

필요하다면 기꺼이

지하철은 만원. 언제나처럼 빈자리 가득하기를 예상했지만 앉을  하나 없고 꼼짝없이 목적지까지 서서  위기에 처했다. 가뜩이나 날도 추운데 쉽게 쉽게 발걸음 하기가 이리도 어려운 일인가, 투정을 부렸다. 껴입은 옷이 무색하게 후끈한 지하철 내부는 괴리감 이상한 것을 안겨주었다.


오랜만에 온 지하상가에서는 또 길을 잃었다. 매번 개찰구를 잘못 찾아가 빙빙 돌기가 일상이었으나 이번에는 용케도 지갑을 꺼내 들기 전에 반대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출구로 향했다. 늦으면 어때, 한산하고 좋기만 한데. 선비의 나라에선 이렇게 사는 거라고 우리 아버지가 그랬다. 외롭기는 해도 말이지.


이름만 눈에 익히고 덜컥 찾아간 향수 가게는 좀처럼 보이지를 않았다. 복잡한 지하상가에서 폐점했는지도 모르는 가게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오늘은 왜 부정의 연속인가. 얼른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향수 진열장이 멀리서 아른거렸고 한참을 그 앞에 앉아있었다. 한참 유리장을 쳐다보다 결제 후에 알아낸 건 그 가게가 내가 찾던 가게였다는 거.


그냥 가기가 아쉬워 커피라도 한 잔 할까, 하다가 근사한 카페를 찾았다. 이번에는 이름만 눈에 익히지 않으리. 그러나 주도면밀히 찾아간 가게는 오늘만 임시 휴업. 신은 나를 조금 덜 돕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즈음에 어둑한 펍 하나가 근처에 보였다. 그 집은 2층에 있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더라.


화장실의 파란 페인트도, 조금 삐뚤한 글씨로 가게명이 새겨진 라이터 굿즈도, 충동적으로 시킨 미도리샤워까지. 이 정도면 앞서 놓친 카페가 아쉽지 않았다. 근사한 펍이었다. 혼자 걸음하는 일은 이래서 좋다. 변수 가득한 낭만이 있다는 것. 외로운 선비의 낙이라는 것. 결국 더 좋은 곳으로 버선발인 채로 향해 가겠지.


미련하게 첫눈이 내린 날 미련한 계획으로 찾아온 근사한 장소. 오늘은 실로 한 문장짜리 하루였는데, 내 삶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미련하게 살아가던 인생 미련한 눈물들로 빚어낸 그럴싸한 작품들. 미련하게 찾아 더듬던 운명 미련한 실수들로 이번에는 절체절명의 사랑까지. 이런 방식이라면 나는 몇 번이라도 더 실수하겠다고 다짐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로맨티시즘. 불가피한 운명이 온다면 기꺼이 사랑꾼이 되어, 이런 외로운 선비의 삶 따위는 버려버리겠다는 과분한 생각 따위를 하는 밤이었다. 복잡한 오늘의 끝이 사랑을 꿈꾸는 일이라는 것도 참 미련하지만, 나는 미련하지만 로맨티시스트 되리라 - 하는 마음이 오늘을 덜 춥게 만든다. 얼마든지 미련해 보이겠다. 바보로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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