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묘미
12월 1일. “김장 김치 갖고 언니한테 갈 거야. 언니가 너도 보고 싶다는데?” 나는 어느새 친구와 함께 캄보디아 프놈펜공항에 내리고 있었다. 얇은 몸빼바지 차림으로 캄보디아살이 18년 차 언니가 나타났다. 언니의 반달 미소와 하이톤 환영 인사가 캄보디아 여행의 기대를 부풀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는데도 금방 10대 시절 똑 부러졌던 언니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는 어제 본 것처럼 시시덕거렸다.
12월 2일. 언니가 살고 있는 프레이벵주로 갔다. 캄보디아에서 두 번째로 못 사는 도시라고 하는데도, 관공서와 사원, 깔끔한 거리가 인상적이었다. 저녁에는 프레이벵주의 언니 집에서 로컬 맥주와 함께 웰컴 파티를 계획했다. 짐을 풀고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오후 7시가 지나고 있었다. 언니는 그제야 맥주를 준비해 놓지 못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언니는 맥주를 사러 나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언니 말로는, 해 질 무렵부터 다음 날 아침 해 뜨는 시간까지는 개들이 무서워서 웬만해서 거리에 나가지 못한다고 했다. 자동차 이동 말고는, 되도록 대문을 꼭 닫고 외출하지 않는다고. 캄보디아의 많은 지역에서는 아직도 개에게 목줄을 채우지 않는다고 했다. 개들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무리 지어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고 했다. 몇 년 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던 동네 아줌마를 개들이 물어뜯어 사망한 적도 있었다고. 그래서 언니네 동네에서는 밤이 되면 개들이 거리를 차지하고, 웬만해서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해 질 무렵부터 해뜨기 전까지는 ‘개들의 시간’인 것이다. 주인도 못 알아보는, 주인을 물어 죽일 수 있는, 본분을 망각한 채 폭력의 이빨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개들의 시간. 언니네 동네 사람 중 많은 이들은 거리를 사용할 권리 중 하루의 절반을 개들에게 내주고 무서워 숨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로컬 맥주파티를 다음 날로 연기했다. 개들의 거리에 언니를 내보낼 수는 없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저녁 내내 꽤꽤댁꾸억~ 울어대던 옆집 닭 소리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싸움닭이라고 했다. “밤이 되니 개들은 거리를 점령하고, 닭들은 시끄럽고. 동네 사람들이 민원 안 넣어요?”“그냥 참고 사는 거지. 난 이제 익숙해져서 안 들려. 흐흐”
12월 3일. 오전 10시. 언니가 후원하는 타 까우(Takau) 중학교에 갔다. 언니가 모금해서 마련한 도서와 장학금을 전달했다. 아이들의 함박웃음과 수줍은 환대는 사진 보조로 따라간 나까지 기분 좋게 했다. 선생님들은 콤팩트로 허옇게 자외선을 차단한 우리 얼굴을 보면서, 연신 감탄했다. “어쩜 그렇게 피부가 하얀가, 예쁘다.” 언니가 통역해 주었다. 친구가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코리아 콤팩트”라고 하자, 선생님들은 코리아 화장품 좋다고 계속 부러워했다.
언니는 캄보디아에서 모금과 자원봉사로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있다. 언니 별명은 ‘자전거 탄 할머니’. 언니는 후원 물품 외에도, 집 뒤뜰의 망고, 잭푸르트, 파파야 등 과일이 익으면 자전거에 매달고 나가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고 있었다. 그런 언니 같은 사람들 덕분에, K-화장품 덕분에, K-팝 덕분에 캄보디아 사람들은 한국을 선망했고, 나는 한국인인 것이 뿌듯해서 오랜만에 으쓱 신나 있었다.
12월 3일 오후 8시. ‘개들의 시간’ 전에 미리 준비한 로컬 맥주와 언니 집 뒤뜰에서 막 딴 싱싱한 과일들을 쌓아놓고 파티를 시작했다. 로컬 맥주 앙코르 비어를 드디어 한 입 머금었다. 갈색 액체는 부드러운 거품으로 시작해서 쌉싸름하고 고소한 풍미로 입안을 가득 채우고, 탄산으로‘찌르르’ 목젖을 흔들며 목구멍을 지나 식도로 내달렸다. ‘그래 이 맛이야!’ 그렇게 캄보디아에서의 이틀째를 기분 좋게 마감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핸드폰들이 일제히 징징거렸다. 친구가 핸드폰을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한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대!”
“크크, 그런 가짜뉴스를!”
“진짜라니까!”
나는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캄보디아는 대한민국보다 두 시간 늦은 시차다. 그러니까 캄보디아 시각 오후 8시 23분, 한국 시각 오후 10시 23분경, 대통령이 직접 긴급브리핑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핸드폰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온갖 두려움이 앞섰다. 자칫 귀국 못 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 떨어져 있는 가족들도 걱정되었다. 게임방에 있던 아들은 아빠의 긴급 호령에 당장 집으로 복귀했다. 1980년 5월 광주의 도청 앞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징집청년 나이를 27세에서 25세로 낮췄다는 기사도 섬뜩하게 떠올랐다. 내 아이들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도 평화롭지 않았는가. “왜?”라는 질문을 하면서도 앞이 캄캄했다.
캄보디아 TV에서도 우리나라 계엄을 보도하고 있었다.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장갑차를 막아서는 시민들, 국회 담을 넘는 국회의원들, 총을 든 채 완전무장 한 특전사 군인들, 국회 문을 막아선 경찰들, 드라마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내일 당장 귀국해야 하나. 비행기표를 당장 구매해야 하는데. 지금 짐이라도 싸둘까. 돌아가선 어떻게 해야 하나. 공항에서 입국이나 가능할까. 다짜고짜 끌려가는 것은 아닌가. 가족들을 나오라고 해야 하나. 난민이 되는 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다.
캄보디아 시각 12월 3일 오후 11시 1분, 한국 시각 12월 4일 오전 1시 1분,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나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의 선포가 남아 있었다. 제2의 계엄선포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자는 둥, 마는 둥 일어나 보니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선포했다고 했다. 비상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다행이었다.
그 여섯 시간 동안 한국은 ‘개들의 시간’이었다. 한국 주가는 폭락했고, 환율은 올랐으며, 태국에서는 원화 환전도 거절했다. 미국, 일본, 영국 등 많은 나라들에서 여행주의보 및 경보를 발령하며 한국을 여행위험 국가로 발표했다. 국민이 이룬 민주주의와 K-문화로 전 세계에 높여진 국격은 비상계엄 선포로 일순간 최하류 국가로 추락했다. 캄보디아 ‘개들의 시간’보다 더 위험했던 한국의 ‘계엄의 시간’에 나는 조금 전까지 한국인으로서 우쭐했던 마음을 바로 버려야 했다. 한국 사람이어서 자랑스러웠고, 한국 사람이어서 부끄러웠다.
다행히 계엄 해제가 되어, 캄보디아에서의 남은 여정은 불안 속의 평온이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만약 계엄 해제가 되지 않았거나, 제2, 제3의 계엄이 선포되었다면, 캄보디아에서 나는 생지옥을 맞이했을 것이다. 여행으로 가족을 떠났다는 자체가 죄책감이 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이산가족이 생길 수도 있구나, 아찔했다.
12월 8일 새벽 1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출발했다. 창공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멀리 캄보디아 땅의 야경이 펼쳐졌다. 별 무리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어둠 속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개들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앙코르 비어와 캄보디아 비스킷을 먹으며, 캄보디아에서 만난 ‘개들의 시간’으로 수다를 떨었다. 해외에서 만난 병맛 호러물이었다고. 말끝에 나는 덧붙였다. “그런데 …, 우리나라도 아직 안 끝난 것 같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