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화려한 축제 (1)
오늘은 대학에서 처음 맞이하는 축제의 첫날이다. 축제는 3일 동안 다채로운 행사들로 진행된다. 내가 참가하는 ‘미스 S선발 대회’가 오늘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오전 10시. 대회에 참가하는 전원 모두가 학생회관 앞에서 모이기로 한 시간이다. 대회는 저녁에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헤어숍, 드레스샵, 도도 메이크업 아카데미 등을 들린 후 리허설도 해야 해서 오전에 발 빠르게 움직이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도착해보니 학생회관 앞에는 리무진 버스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먼저 도착한 광고 동아리방 언니, 오빠들이 스태프로 활동하며 대회 참가자들이 도착하는 대로 버스에 탑승하도록 안내했다. 오늘 전문가에게 메이크업받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들 기초화장도 하지 않고 나왔어야 했다. 나는 평소에도 스킨, 로션조차 잘 챙겨 바르지 않아서 여느 때처럼 세안만 하고 나왔다. 메이크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민낯이 ‘부끄럽다’, ‘창피하다’, ‘어색하다’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당시에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은 민낯으로 누군가를 만나는데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참가자들은 여전히 짙은 화장에 본인의 민낯을 감추고 나와 있었고, 또 다른 참가자들은 어제와 다른 얼굴이었지만 화장을 지우니 더 청순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화장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오늘 어떻게 변할지 너무도 궁금했다. 하지만 머리를 기른다고 길렀어도 아직 단발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머릿발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우리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리처드 헤어숍에서 머리 손질을 받았다. 다들 머리가 길어서 머리를 예쁘게 돌돌 말아 올려 핀으로 고정시키기도 하고, 고데기로 자연스러운 웨이브를 넣어서 어깨선으로 늘어뜨리기도 하고, 윗 머리만 붕 띄워서 틀어 올려 앙증맞게 연출하기도 했다.
‘아, 다들 머리가 화려해졌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휴~ 머리가 너무 짧아서.... 난....’
잠시 우울해졌다.
그때, 내 머리를 담당하는 헤어드레서가 다가와,
“머리가 짧아서 귀엽게 연출해도 좋을 것 같아요. ‘남자 셋 여자 셋’의 이의정 머리 알죠?”
“(깜짝 놀라) 이의정 머리요?”
“하하하하. 전체 머리를 다 아웃컬로 하는 건 아니고.... 아래만 살짝 아웃컬을 넣어줄게요.(눈 찡긋)”
이의정 머리라는 말에 순간 우려했던 바와 달리, 헤어드레서가 머리를 만지면 만질수록 내 얼굴선까지도 달라 보였다. 마법사가 따로 없었다. 고데기로 옆머리에 웨이브를 넣어서 자연스럽게 귀 뒤로 넘어갈 듯 내려주고 머리 아랫부분을 아웃컬로 들어 올린 일명 ‘재즈 머리’를 완성시켰다. 머리가 짧아 나만 특별하게 반짝이 스프레이를 뿌려주는 거라며 머리 위로 눈을 뿌리듯 공중에 펄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아이섀도만 펄이 있는 줄 알았는데, 헤어스프레이도 반짝이가 있다니! 신세계였다.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반짝반짝 빛났다. 저녁에 조명을 받아 반사되면 분명 더 이쁠 것 같아 들뜨기 시작했다.
‘짧은 머리가 이렇게 화려해질 수 있다니. 역시 전문가가 다르긴 달라.’
사람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조금 전 의기소침해지며 우울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그라지고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
서로의 머리가 이쁘다고 서로를 칭찬하고 부러워하며 우리는 헤어숍 바로 옆 드레스 샵으로 이동했다. 벽면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마네킹에 형형색색의 드레스가 한 벌씩 입혀져 있었다. 너무 이쁜 드레스가 많아서 어떤 걸 골라야 할지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드레스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고르도록 하면 좋겠지만, 마음에 드는 드레스가 겹칠 수도 있어서... 제비뽑기로 드레스 픽하기로 하죠. 자, 종이는 준비해 놓았으니 바로 고르시면 돼요. 여기서 계시는 순서대로 종이 뽑도록 할까요?” 광고 동아리 언니가 상자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우리는 상자 안에 든 종이를 하나씩 뽑아 들었다. 드레스가 다 이뻐서 어떤 것이든 괜찮을 것 같았지만 그중에서 빨간색 드레스만은 피하고 싶었다. 너무 강렬한 컬러인 데다 몸매가 딱 드러나는 핏이어서 가능하면 ‘저 드레스만 피하자’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아마도 제비뽑기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한 명씩 번호를 공개하면서 본인의 드레스를 확인했다. 175센티미터의 키가 큰 언니는 타이트한 황금 드레스, 이목구비가 화려한 언니는 도도한 실버 드레스, 약간 통통하지만 토끼같이 귀엽게 생긴 언니는 패티코트가 있을법한 A라인의 하늘색 드레스(드레스 중 가장 이뻤다), 코미디언 조혜련을 담은 참가번호 1번 언니는 화이트 미니 드레스를 받아 들고 각자 탈의실로 들어갔다. 이제 남은 드레스가 점점 줄어들면서 빨간색 드레스가 걸릴 확률이 높아져만 갔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법. 아뿔싸. 내가 고른 번호가 강렬한 Rrrrrred 드레스였다. 울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빨간색 드레스를 부여잡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사이즈도 잘 맞고 실상 입어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어깨선이 많이 드러나는 입술 라인의 드레스여서 쇄골을 강조하는 데다, 팔을 들어 올리면 중국 의상처럼 소매가 아래로 길게 늘어져 우아해 보이기도 했다. '달콤한 레몬형' 합리화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좋은 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참가자 전원이 드레스로 환복 한 후, 우리는 마지막으로 메이크업을 받으러 갔다. 도도 아카데미로 들어서니 TV에서나 봤음직한 연예인 분장실과 같은 메이크업 룸이 여러 곳 있었다. 그중 한 곳으로 인도를 받아 참가번호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나를 담당한 메이크업 아티스트 언니는 이제 갓 서른 살을 넘긴듯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나를 보자마자,
“눈은 아이홀로 하면 괜찮겠네..”라고 했다.
'아이홀은 뭐지?'
전문 용어인 거 같은데 어떤 메이크업인지 궁금해졌다. 그것이 어떤 메이크업인지 확인하는 데까지는 두어 시간이 걸렸다.
너무 가까이서 화장을 하니 서로의 숨결이 들릴 정도여서 민망했다. 숨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보니 호흡을 의식하게 되고, 호흡을 의식하게 되니 호흡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숨 쉬는 것도 불편할 정도니 그 두 시간이 오죽이나 길었으랴.
가만히 앉아서 눈 감고 얼굴만 내민 채 화장을 받는 것 자체가 곤혹이었지만 이쁘게 변해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그 시간을 견뎌내었다. 초반 한 시간이 힘들긴 했지만 이런 경험 자체가 귀하고 특별했기 때문에 행복감이 더 컸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두 시간 동안 공들여 분을 두드려주고 눈에는 색조를, 입술에는 라인과 컬러를 입혀주니 오늘만큼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듯했다.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듯한 황홀감에 젖어들어 나머지 한 시간은 어떻게 시간이 흐른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이제 다 되었어요."라는 말에 눈을 뜨고 '드디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무용 시간에 공연하느라 분장 같은 화장을 했었던 이후로는 화장한 내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안경을 벗은 데다 전문가에게 메이크업을 받았더니 눈매가 한층 깊게 살아났다. 눈이 1.5배는 커진 듯했다. 이건 마술이었다. 속눈썹까지 붙이니 신부화장이 따로 없었다.
오늘 내가 입는 드레스 컬러가 '레드'여서 아이섀도 색상을 보라색 계열로 해주었다. 내가 메이크업을 한다면 보라색을 감히 선택하지는 못할듯하다. 손이 잘 가지 않는 컬러일 텐데 역시 전문가답게 보랏빛 색조도 이렇게 우아하게 소화시킬 수 있구나 싶었다. 화려하게 변신한 내 모습이 아직은 낯설고 어색했다. 마치 소녀에서 여자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조금 더 과장되게 말하자면, '샴푸의 요정(마술 샴푸로 머리를 감으면 미녀로 변신한다는 설정의 드라마. 2004년도 방영. 극 중 조정린이 마술 샴푸로 머리를 감으면 정시아로 변함)'같은 느낌이랄까.
참가자 전원이 모두 메이크업을 받은 후 우리는 몰라보게 화사해진 서로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누가 더 이쁜가 비교하면서 경계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서로의 모습에 감탄하고 즐거워하는 분위기여서 이동하는 내내 유쾌했다.
모든 준비과정을 마치고 리허설을 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학교로 향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리허설부터 대회가 끝날 때까지 각자 참가자들의 메이크업을 체크해야 해서 함께 학교로 이동했다.
잔디광장 바로 옆 건물 2층 로비에서 리허설을 시작했다. 리허설을 받는 중간에 갈증이 나 물을 한 모금 마셨더니 메이크업 아티스트 언니가 재빠르게 다가와 립스틱을 덧발라준다. 화장이 무너지는 않았나 립스틱이 지워지지는 않았나 등등을 살핀다. 마치 매니저처럼 챙겨주니 리허설도 대강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복도창 너머 무대가 정비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온다. '잘할 수 있어 '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보았다. 파트너와 함께 입장하는 것까지 연습을 해본 뒤 우리는 마침내 대기실로 몸을 옮겼다.
이제, 축제의 꽃 '미스 S선발 대회'가 시작될 시간이다. 건물 밖 잔디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엄정화의 'Festival' 노래가 얹히며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높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