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야기
할머니에게 들은 내 어릴때
구정에 제주도에 가기전에 명절 인사를 드리러 부산 사직동에 계시는 98세 외할머니를 뵈러갔다. 몇일전에 많이 아프셨다가 괜찮아지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귀가 잘 안들리셔서 귀에 대고 크게 말해도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추측을 하시고 답을 하신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일때도 있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실때도 있다(내 이야기를 다르게 추축하셔서)
나는 어릴적 기억이 없다. 초등 4,5,6학년때(당시는 국민학교) 선생님들에게 대들고 개기다가 혼난 경험말고는 중학생 전의 기억이 거의 없다. 전무하다. 요즘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자주 하는데, 나는 왜 어릴적 기억이 없을까 궁금했다. 할머니 집에 들린 김에 내 어릴때 어땠는가 물어보았다. 나는 외할머니 손에 컸다. 엄마는 초등교사였지만, 자기가 원하는 직업도 아니었고(먹고 살려고 선택한 직업) 아이들 가르치는 일도 좋아하지 않다보니 학교에서 일하고 나면 집에 오면 지쳐서 나를 전혀 케어할수 없는 상태였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시달렸는데, 집에오니 자신의 혈연이긴 하지만, 두 아이가 얼마나 귀찮게 느껴졌을까. 엄마는 그래서 짜증을 많이 냈다고 한다.
나는 어릴적에 어린이 아이들과 어울려 논 기억이 얼핏있어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니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 혼자 아이 둘을 키우니 광목천(귀저귀용)이 세탁기에 한가득이라는 말로 상상이 되는 것처럼 육아에 힘드셨을거 같다. 나는 놀 아이가 없으니 여동생을 장난삼아 괴롭혔고, 동생은 맨날 나때문에 울었던거 같다. 엄마의 돌봄이나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을거 같고, 아버지는 원양어선으로 늘 부재했다. 할머니는 우리의 기본적인 생리욕구만 해결해주었을테고, 감정이나 마음을 살펴주지는 못했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나는 고집이 셌다고 한다.
할머니가 귀가 안들리다보니 내 어린시절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것저것 물어볼수는 없으나 대충의 이미지는 느껴졌다. 양부모는 존재했지만, 부재했고, 무언가를 감정적으로 수용되고 포용되고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다는 것. 그나마 중1때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렸으나 중2때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아버지의 대순진리회 활동때문에) 집안분위는 삭막해지고 사춘기 시절 중2때부터 방과후에는 내 방안에만 숨어 지냈다. 그게 내 우울증의 시작이다. 부모와 애착관계도 전혀 형성한적이 없고 경험한적이 없으니 그런 상태로 20살 대학생이 되었을때 얼마나 망막했을까? 잘해보려는 마음으로 과대표는 되었지만, 과대표가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몰랐고, 친구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도 몰랐고, 좋아하는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것도 없는 아이였으니 조금만 낯설고 어려운 경험이 생기면 내방안으로(우울증으로) 숨었던 것이다.
할머니집에서 나와 내차에 타고 한참을 울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아이는 얼마나 오랫동안 외로웠을까. 그런 아이가 겨우 살아내어 28살때 개인상담을 받기 시작하고 30대부터 내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법을 하나하나 아주아주 더디게 익혀 나갔다.
우리 가족을 생각하니 네명 모두 각자가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와 유대관계가 없으니 아버지의 내면적 허기를 이해할 이야기가 없지만, 결혼하고 10년 넘게 원양어선을 탔다가 사회에 나왔을때 얼마나 망막했을까 싶다. 세계 여기저기를 항해했지만, 겉과 달리 내면적 허기가 있었기에 배를 내리고 나서 대순진리회의 논리와 정서에 훅 가서 빠져버린게 아닐까. 아버지는 대순진리회에서 어떤 위안을 얻었을까. 엄마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아버지는 한살때 보도연맹으로 돌아가셨다) 먹고 살기위해 안정적인 직장인 교직을 택했지만, 그건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엄마는 교사생활을 하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홀어머니 밑에서 감정적인 채움과 돌봄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으니 자신의 아들이 혼자 방치되어 있어도 그걸 돌볼여력도 없었고, 그게 필요하다고 그때당시는 인지도 못했다. 교사 생활하며 자기 하나 겨우 건사할때였다. 그런데, 그 아들이 29년동안 우울증이 있었으니 속으로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동생은 나름 교회공동체의 도움으로 그 불안에서 어느정도 나왔지만, 하나 있는 오빠가 한번도 제대로 오빠역할을 한적도 없고 자신도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으니 지금까지도 엄마랑 다투며 그때 못받은 사랑을 투정하고 있다. 네명이 얾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그런 네명이 이제 겨우 각자나름의 안정을 찾고 살고 있으니(아버지와는 내가 연락을 끊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다행이다. 감사한 일이고.
다음에는 엄마집에 갔을때 내 유년시절의 기억을 물어봐야겠다. 내 어린시절의 탐구는 계속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