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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별의식: “나는 왜 살아야 하나?”에 답하는

책리뷰

by 박조건형

세 번째 이별의식: “나는 왜 살아야 하나?”에 답하는 한 자살 생존자의 기록(김세연 지음)


집에 자살생존자의 책들이 몇 권 있다. 자살 생존자란, 지인이나 가족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분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김세연씨는 2002년, 17살때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집에서 엄마의 죽은 모습을 발견했다.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하고 집 밖으로 도망쳤지만, 엄마의 자살을 목격한 것이다. 어른들의 뜻에 의해 엄마의 장례식에 함께 하지 못했다. 언니는 엄마의 장례식을 치렀다.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과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아픔일까.


무언가에 몰입할 것이 필요해 그때는 공부에 집중했고, 좋은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을 갈 수는 있었다. 그리고, 2007년 22살부터 8년간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회피성 유학이었다. 엄마가 죽었을때 경찰서에서 오열하던 아빠의 모습이 세연씨는 실망스러웠다.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나약함에 아빠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아빠도 그런 죽음은 처음이었고 충격이었고 힘들었을테지만, 오랜시간 아빠를 누군가를 잃은 한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인정하지 못했다.


이 책은 2022년에 나왔다. 20년전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해 애도와 치유작업을 이렇게 정리 했다는 것이 놀랍고도 대단하다. 중간에 일기가 자주 인용되어 있는데, 일기를 오래 적어온 것이 책을 쓰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일기라는 형식을 좋아하지 않는데, 잘 안 읽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만 쓰는 글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글이 읽힐거라고 예상하고 쓰는 글과는 다르다. 20년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고, 죽음과 어둠에 대해서 사유했을까.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일기로 적힌 부분은 뛰엄뛰엄 건너 띄며 읽었다. 그 일기가 담고 있는 어둠도 힘들었고, 그 일기를 세밀하게 읽는다고 그때 느꼈던 세연씨의 감정과 생각들을 제대로 알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인 PTSD는 사건이후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다루어어 주어야 장기적으로 가지 않는다고 한다. 2002년 이었으면 우울증이나 PTSD라는 단어도 생소했을때 였기 때문에 세연씨에게 필요한 상담이나 치료가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마 그런 질문을 오래 자주 들었을 것이다. “너는 왜 아직도 그 죽음에 연연해 하니? 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니?” 그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아픔과 상처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 과연 적절한 애도의 시간과 적절한 치유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 개인이 가진 사정이나 상황, 나이에 따라 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또 내 우울증 이야기를 한한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온전하게 지내기 까지 29년의 시간을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절망하며 보냈다.


적절한 애도의 시간이란 없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갈수도 없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쉽게 하면 안된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인생이라는 연륜이 생기면 조금은 관조 하듯이 볼때가 오기는 오겠지만, 그건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완전히 괜찮아지는 것을 불가능하다.


에필로그 까지 다 읽고 책장을 덮었다. 3년이 지난 지금의 세연씨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여전히 힘들때도 있고, 아플때도 있지만, 그래도 생의 의지를 가지고 어딘가에서 살고 계실것 같다.


20년의 애도의 시간을 읽으며 우울과 무기력과 절망, 분노의 감정을 읽었다. 엄마를 따라가고 싶었을때도 많았을테고 이렇게 사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많이도 생각했을 것이다. 조카가 태어나고, 조카가 이모인 세연씨에게 할머니는 하늘 어디에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세연씨의 언니는 자신의 딸에게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마음이 우울하고 불안하고 삶의 목표도 없고 절망적일때 사라지고 싶은 마음은 절대적이다. 남아 있는 살람들을 생각하며 죽지말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나또한 그랬다. 조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죽어버린 후의 조카를 생각해 본다. 원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해 보고 원가족(아빠와 언니)과의 적절한 거리감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본다.


누군가가 비슷한 경험을 한 분에게 세연씨의 20년간의 사투의 기록이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조금은 빨리 자신을 수용하고 죽은 이와 자신을 분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조금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세연씨도 어디에선가 덜 아파하고 자주 기뻐하며 잘 살아가고 계시길 마음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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