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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노트

2025-16.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라오스계 캐나다 이민자 소설가의 서글프지만 꿋꿋한 삶의 이야기

by 성경은

작가가 수반캄 탐마봉사 Souvankham Thammavongsa라고 라오스계 캐나다 시인이자 소설가인데, 이 첫 소설집으로 2020년 캐나다 최고 영예의 문학상인 스코샤뱅크 길러상을 받았다 한다. 단편 소설 14편이 엮여 있다. 그 첫 단편 소설이 책의 제목인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이고, 대부분의 단편 소설들은 다 라오스계 캐나다 이민자들의 서글프지만 꿋꿋한 삶의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다. 읽으면서 다 그냥 너무 어둡고 좀 답답하네, 하는 느낌을 주로 받았고 특별히 재밌지는 않았다. 그렇더라도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하게 하는 포인트들이 많아서 왜 상을 받았는지는 알겠다. 이를테면 마지막 단편 소설인 '지렁이 잡기'의 일부를 살짝 공유하자면 아래와 같다.

"학교에서 어떤 남자애가 내게 댄스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였다. [...] 제임스는 뭐든 뛰어났다. 나는 그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상자를 채우느라 고생하고, 지렁이를 어디서 찾는지 헤매다 발로 밟아버리고, 지렁이를 너무 세게 당겨 그의 손 안에서 지렁이가 끊어지는 걸 보고 싶었다. 그가 지렁이를 많이 잡지 못했다고 야단맞고, 통제할 수 없는 날씨 같은 것에 그의 생계가 달려 있기를 바랐다. [...] 이곳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라오스에서 의사, 교사, 농장주였다. 엄마도 자기 땅을 가진 농장주였다. 밤중에 부드러운 흙 위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 없는 것들을, 땅의 똥을 찾는 인생을 살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제임스는 아이 말고는 무언가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제임스가 지렁이를 잡는 모습에서는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오래 지나지 않아 열네 살의 제임스는 우리의 관리자가 됐다. 농장 주인은 자신을 대신해 일을 관리해 줄 사람을 원한다며, 제임스가 영어에 능통하니 그 역할에 적임자라고 했다. 제임스가 처음에 기꺼이 무보수로 일한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모두의 본보기라고도 말했다. [...] 제임스와 처음으로 지렁이를 잡으러 간 건 불과 몇 주 전이었지만 그동안의 시간이 평생처럼 느껴졌다. 정말 많은 것이 변했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농장의 상사 제임스와 등하교를 함께하는 열네 살 남자아이 제임스를 둘 다 알고 있었다. 그 둘은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일하며 새로이 발견한 그의 차가운 모습이 다른 무언가로 변하기를 기다렸다.[...] 댄스파티가 열린 밤, 엄마는 내가 입을 분홍색 드레스를 내 침대에 펼쳐두었다. [...] 제임스는 혼자 왔다. [...] 그가 초인종을 울렸다. 다시 한번 울렸다. 몇 분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자, 그는 문을 쾅쾅 두드리더니 손잡이를 비틀어댔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 그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손가락으로 문구멍을 막고 가만히 있었다."

여기서 화자가 제임스의 뛰어남을 인지하며 실패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질투나 도덕적 열 등함이라기보다는 '백인성' 자체가 자산이 되는 현실에 대한 인지, 그로 인한 조건의 대칭을 요구하는 욕망에 가깝다. 제임스는 농장의 노동자가 아니라 영어 능력을 이유로 즉시 관리자가 되고, 무보수 노동조차 도덕적 우월함으로 해석된다. 아이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백인성은 즉시 권력으로 전환된다. 반면에 이민자 아이는 끝없이 노동자로 고정된다. 화자의 작은 복수로 제임스는 접근 권한을 거부당하고, 설명받지 못하며, 울어도 응답받지 못한다. 이는 개인적인 복수를 넘어 이민자 공동체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제도적 침묵과 배제의 역전이다. 하지만 권력은 흔들리지만 전복되지는 않는다. 아주 현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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