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팅힐, V&A, 소호
노팅엄 Nottingham 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오랜 친구랑 오랜만에 런던에서 만나기로 했다. 1시간 기차를 타면 런던까지 15~40만 원이지만 2시간 반 고속버스를 타면 3만 원에도 런던에 갈 수 있어서 가난한 교수인 나는 버스를 자주 애용한다. 고속버스는 런던 빅토리아 Victoria역에서 내리는데 버스역에 내리면 보통 롤라의 Lola's 컵케잌을 먹는다. 너무 달지 않으면서 케잌이 아주 촉촉한 것이 내 취향이다. 시골인 우리 동네 레스터 Leicester에서는 맛볼 수 없는 세련된 도시의 맛이다. 런던 놀러 가시는 분들은 한 번쯤 드셔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다.
컵케잌을 하나 먹으면서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역사 안대기 의자에 앉아 사람 구경하는 것이 런던 방문 시 보통의 루틴이다.
친구랑 만나기로 한 곳은 노팅힐 Notting Hill의 포토벨로 거리 시장 Portobello Road Market이다. 노팅힐은 영화로도 굉장히 유명한데, 나는 영국 살면서 런던 방문을 셀 수 없이 많이 하고서도 여기는 이번에 처음 와봤다. 건물들이 알록달록해서 예쁘다.
빈티지 잡다구니들을 주로 파는 곳인 것 같다.
알록달록한 가게들이 꽤나 길게 이어진다.
빈티지 사진기라든가 식기들은 좀 수집하는 맛이 있을 것 같다.
특히 귀여운 동물 캐릭터들이 있는 접시들은 진짜 좀 탐이 났다. 무언가 사고 싶었지만 무겁게 하루 종일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 구경만 하니까 좀 아쉬웠다. 다음에 이런 시장은 관광 일정의 시작이 아니라 끝으로 해서 사고 싶은 건 살 수 있게 해야겠다.
웃기고 재미난 그림 액자들도 마음에 드는 게 진짜 많았다. 집에서 시간 날 때 좀 모작을 해야 하나 싶다.
시장 구경을 한참 하다가 점심 먹으러 농장 아가씨들 Farm Girls이라는 식당에 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줄을 길게 서서 들어가는 것이 엄청난 맛집인지도 모르겠다.
영국에서 요새 트렌디한 한국 음식을 보여주는 서울 계란 Seoul Eggs이라는 메뉴를 시켰는데, 정말 서울에서 아무도 전혀 먹지 않을 것 같은 계란 부침개(어린 브로콜리, 파, 김치, 고수가 들어감)가 나왔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줄을 섰을까 이해가 안 되는 맛이었다.
밥도 먹었으니 왔던 길을 돌아간다.
친구가 V&A (Victoria and Albert Museum, 빅토리아와 알버트 박물관) 가고 싶다 그래서 걸어가다 보니 중간에 하이드 파크 Hyde Park를 지나간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공원에 자리 깔고 앉아서 피크닉을 즐기거나 일광욕을 하고 있다. 여기서 치맥 사다가 하루 종일 앉아서 음악 듣고 책 읽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V&A는 예술 디자인 박물관이라 내 전공과 너무 밀접하여 이미 5번 이상 왔었던 것 같지만 언제 와도 좋다. 복도만 봐도 기분이 좋다.
한 구석에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디자인 전시도 있었는데 우리 동네 표지판이 나오니까 아주 반가웠다.
날씨가 좋으니 스테인드 글라스 복도가 유독 예쁘다.
후문으로 들어갔다가 정문으로 나오면서 나의 최애 유리 공예를 보니 반가웠다. 요새 도자기 입문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도자기 수업이 끝나면 유리 공예를 해볼까 싶다.
친구가 자기가 런던 오면 맨날 간다는 라이브바에 가고 싶다 그래서 소호 Soho로 이동하면서 차이타 타운을 지나갔다. 날씨 좋은 토요일이라 그런지 어딜 가나 사람들이 어마어마 많다.
친구의 단골 라이브바는 블루스밖에 없는 바 Ain't Nothin But The Blues Bar라는 곳인데 생각해 보니 몇 년 전에도 이 친구랑 한 번 왔었다. 남자분이 통기타 하나를 메고 솔로 공연을 하고 있다. 맥주 한잔씩 시키고 앉을자리를 찾는데 자리가 없다.
한 30분쯤 서있으니까 솔로 공연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 무대 앞 가운데 테이블 자리가 났다. 앉아서 좀 기다리니 아까 솔로 공연하던 사람이 밴드 공연을 한다. 블루스바인데 음악은 컨추리풍이다.
음악은 좋았는데 너무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밖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담배 냄새가 안에서도 나고 공기가 안 좋고, 술 취하고 흥 많은 사람들이 계속 왔다 갔다 움직이고 춤추면서 계속 스치거나 치고 지나가는 것이 좀 거슬렸다. 내가 이런 곳을 즐기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나 싶었다.
그렇더라도 전반적으로는 꽤나 즐거운 당일치기 런던 여행이었다.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니 근황 토크도 하고 반갑고 좋고, 날씨 좋은 날 런던 나들이를 나오니 기분 전환도 되었다. 다만 확실히 런던은 공기가 안 좋은지 차들이 많은 길에서 자꾸 기침이 났다. 혼자 여행하는데 워낙 익숙해서 그런지 친구한테 맞춰주면서 같이 움직이니까 솔직히 혼자 다닐 때보다 좀 재미와 신남, 편안함은 덜 했던 것 같다. 나같이 취향이 확실하고 대문자 I에 저질 체력인 사람은 역시 혼자 돌아다니면서 내가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거 보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쉬고 싶으면 쉬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앞으로는 아주 편하고 친한 친구가 아닌 이상 괜히 어디 멀리 가서 너무 긴 시간을 같이 보내지는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