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프 성
뱅크 홀리데이 bank holiday 주말이라 몇 달 전 별생각 없이 카디프 Cardiff 기차표를 사놨었다. 호텔을 예약할 때 보니 싼 방이 하나도 없어서 아니 언제부터 카디프가 이렇게 인기 만점 여행지였지, 하고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기차 타면서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오늘은 카디프에서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다. 버밍햄 Birmingham에 가서 카디프 가는 기차 타려고 플랫폼에 가니 축구 응원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원래 10시 반 기차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타기 전에 이미 서서 탈 수 있는 공간까지 다 차버려서, 그다음 기차까지 1시간을 그냥 기다렸다. 그다음 기차도 겨우 겨우 복도 간이 의자에 앉아서 갔는데, 또 서서 타는 사람들까지 가득한 만석이었다. 할튼간 영국 사람들의 축구 사랑이란 어마어마하다.
원래 계획은 12시 반에 도착해서 점심 먹고 호텔에 짐을 놓고 관광을 시작하는 거였는데, 1시 반이 넘어서 도착했고 별로 배는 고프지 않아서 호텔에 짐만 놓고 관광을 하러 나섰다. 카디프 성 Cardiff Castle에 갔다.
아래 사진에서 왼쪽 건물이 성, 가운데 앞에 있는 것이 중력식 투석기/트레뷰셋 treduchet, 오른쪽 언덕 위에 있는 것이 중심 탑/돈존(방어의 최후 거점) Cardiff Castle Keep이다.
성 정면에서 보면 성이라기보다는 잘 사는 집 저택 같고, 실제로 왕족이 아니라 귀족들이 살던 곳이란다.
성 안에 들어가니 우중충한 외부와 달리 방들이 아주 화려하다. 이런 걸 고딕 리바이벌 Gothic Revival 양식이라 부른다 한다.
제일 화려한 방은 아랍 방 Arab room이다. 이슬람 건축에서 영감을 받은 금빛 천장 무카르나스 Muqarnas (층층이 쌓은 기하학적 삼차원 장식)가 멋지다.
중세풍 연회장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좋았다.
성은 역시 중세 성이 제일 멋지지 않나 싶다. 달타냥과 삼총사 생각난다.
도서관 입구는 문이 두 개인 것이 특이하다. 문이 하나면 되는데 왜 굳이 두 개를? 하나는 귀족용, 하나는 하인용이라 하기에는 문 두 개가 사이즈나 장식이 거의 동일하다. 아마도 사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공간이니까 손님들에게 자유롭게 들어가시라, 하는 어떤 상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도서관이 집에 있으면 나도 독서를 좀 더 자주 많이 할 것 같다.
도서관 벽 장식 중에 좀 신기한 것은 역사적 인물, 신화 속 인물, 성인, 위대한 작가 등이 다 같이 있다는 점이다. 벽난로를 보면 히브리어를 들고 있는 가운데 남자는 아마도 예수님인 것 같고, 그 오른쪽에 이집트 상형문자를 들고 있는 사람은 이집트 여왕인 것 같다. 이런 식의 조합은 다른 곳에서 잘 볼 수 없어서 참 신선하다.
성을 다 보고 중심 탑을 보러 갔다. 웨일즈 Wales를 상징하는 빨간용이 성과 탑 사이에 있다.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계단이 아주 가파르다. 아직 40대라 올라갔는데, 50대가 되면 무서워서 못 갈 것도 같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탑의 꼭대기에 올라간다고 대단한 뷰가 있지는 않았다.
성곽길 Battlement Walk을 따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 대피소 wartime shelters로 썼던 공간을 그대로 복원해 놓은 곳도 있다.
안에 들어가면 음향 효과와 분위기가 너무 리얼해서 PTSD올 것 같다. 갑자기 지금 전쟁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있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그런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곳인 듯하다.
길고 어둠 컴컴한 PTSD 공습 대피소를 빠져나가니 아주 자랑스럽게 걸어놓은 웨일스와 영국의 국기들이 펄럭이는 성곽길이다.
성곽길에서 바라보는 중심 탑의 측면이 또 멋지다.
입/출구 근처에 카디프 성 박물관도 있는데 안에 들어가면 로마 성벽도 보존되어 있다.
로마 성벽이 있어서 그런지 그 복도 끝에 "로마 전차 코너" Roman Chariot Corner라는 벽화 작품이 있다.
벽화의 마지막 부분에 말들과 전차병이 있는데 실제로 보면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멋지다.
전쟁 박물관 같은 것도 같이 있었는데 내 취향은 아니었다. 다 봤다 싶어서 나가려고 하니까 패딩턴 Paddington이 앉아 있는 벤치가 있다. 귀엽다.
입장권이 16파운드(3만 원 정도)였는데 진짜 돈이 하나도 안 아까운, 볼 것이 아주 다양하고 많은 좋은 관광지였다.
(다음 편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