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웃긴 내 친구 얘기 같은 스탠드업 코미디
코로나 락다운이 막 끝난 2022년 다시 극장에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조안 맥날리 Joanne McNally의 스탠드업 코미디, The Prosecco Express 프로세코 특급열차를 너무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또 동네 극장에 투어를 온다길래 나름 기대를 하고 티켓팅을 일찍 해서 제일 앞자리를 예약했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가끔 가기는 하는데, 이렇게 같은 코미디언 쇼를 두 번 가는 거는 처음이다.
이번 공연 이름은 Pinotphile 피노 누아 애호가(Pinot Noir 포도 품종인 피노 누아 + phile ~를 사랑하는 사람들 접미사)이다. 큰 의미는 없고 워낙 영국 거주 여성분들이 (나도 포함) 포도 베이스 주류를 좋아하니까 자꾸 쇼 이름에 샴페인이나 와인을 넣는 것 같다. 무대에도 그래서 테이블에 레드와인이 올려져 있다.
조안은 83년생 40대 싱글 여자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 그런지 99% 관객이 여자들이다. 전체 관객 중에 남자가 열명도 안 되는 것 같았다. 14세 이상 관람가라 그런지 10대도 없다. 20대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아주 수위가 높고 농도가 짙은 여자 으른들을 위한 코미디라는 것이 느껴지는 관객석이다.
저녁 8시 시작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8시 15분이 되어서야 게스트 코미디언이 나왔다 (물론 게스트도 여자). 게스트가 한 10분 짧은 쇼를 하고서는 이른 인터미션이 있었다. 아마도 게스트 코미디언을 통해 관객 성향을 좀 파악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뭐, 아닐 수도 있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실제로 조안이 무대에 나온 것은 9시가 다 되어갈 때였다. 그리고 공연이 10시에 끝났으니까 실제 조안 공연은 1시간인 거다. 난 공연이 2시간이라고 생각하고서 제일 앞자리 티켓 가격이 27파운드(한화로 5만 원이 살짝 넘음)인 것이 되게 싸다고 생각했는데, 1시간 10분에 5만 원이면 막 싸지는 않다.
내용은 진짜 수위가 높아서 그런지 나이가 지긋하신 (아마도 종교심이 깊은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분들은 중간에 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게 좀 신기한 게 비슷한 코미디를 남자 코미디언이 했으면 나도 좀 무례하다 생각하고 불편하게 느꼈을 것도 같은데, 이걸 여자가 여자 버전으로 하니까 왠지 그냥 되게 웃겼다. 나는 생각보다 무례한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런 코미디쇼를 여자가 혼자 하는데 극장이 만석이라는 건 한국에서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니 일단 한국이라는 보수적인 유교 나라에서 여자 코미디언이 이런 걸 하려는 생각이나 할 수가 있을까 싶다.
웃긴 것뿐만 아니라 뭔가 어떤 통쾌함? 내지는 해방감? 같은 것도 좀 느껴졌다. 꼭 성적인 얘기를 적나라하게 해서만은 아니고 전반적으로 뭔가 "모름지기 여자란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사는 거지"라는 (우리가 평소 딱히 불합리하다거나 억압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회적 고정관념이나 기대치에 아주 정반대를 보는 것 같아 좀 속이 시원했달까. 나도 어릴 때부터 꾸준하게 여성스러움과는 거리가 있어왔던 사람인데, 너무 이상해 보이거나 튀지 않게 나름 여성적인 사회적 마스크를 쓰고 살아왔어서 더 좀 간접적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일 끝나고 좀 피곤해서 집에서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었는데, 막상 공연에 가니 너무 즐거웠다. 이렇게 많이 연달아 한 시간 내내 크게 웃어본 것이 언제였나 싶다. 제일 앞자리에 앉으니 계속 조안이랑 눈이 마주쳐서 아주 친근하고, 마치 제일 웃긴 내 친구가 수위 높고 진솔한 자기 얘기를 진짜 웃기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도시에 이동을 해서까지 볼 쇼는 아니지만, 다음에 (어쩌면 또 3년 뒤) 우리 동네 레스터 Leicester에 다시 온다면 또 보러 갈 것 같다. 또 만나 조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