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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ngeun Sung Oct 17. 2024

교수로 산다는 것 3: 연구 주제에 발목잡힘

연구 주제에 발목이 잡혔다.

교수로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 연구 주제에 발목이 잡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목이 잡혔다기보다는 내가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내내 열심히 삽질을 하여 땅을 판 뒤에 그 구덩이에 자진하여 뛰어 들어가서 더 열심히 땅을 더 깊숙이 파서 이제 내가 판 구덩이에서 나갈 수 없게 된 것에 더 가까운 상황이 아닐까 싶다. 이 땅 밑에서 내가 있는 구멍을 더 넓고 깊게 계속 확장하여 파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어느 한 방향 혹은 여러 방향으로 다양한 터널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무한하지만, 더 이상 땅 위로 올라가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비유를 걷어내고 상황 설명을 하자면, 2013년 박사 과정을 시작했을 당시 나는 업싸이클링(upcycling, 새활용) 연구를 시작했고, 2024년인 지금까지도 같은 주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업싸이클링 전문가가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업싸이클링 전문가 내지는 업싸이클링 전문 교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앞으로 업싸이클링과 관련된 다른 확장 연구들을 다양하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으나,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 연구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내가 연구 분야를 바꿔서 전혀 모르는 분야 연구를 시작하려면 박사생을 받는 것 이외에 (혹은 내가 두 번째 박사를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슨 좋은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다른 묘안이 있어 실행에 옮겨 성공적이었던 경험이 있는 교수님들은 연락 주시면 밥이라도 한 끼 사도록 하겠다.


트랙 레코드

돈이 전혀 필요없는 연구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교수들은 연구를 하기 위해 연구비가 필요하다. 장비나 기구, 재료를 사야 하거나, 연구원을 고용하거나, 교통비가 필요하거나, 어디에든 돈이 들 수 있다. 연구비를 신청하려면 대학 내의 연구비든 외부 연구재단 연구비든 연구 제안서와 함께 항상 트랙 레코드(track record, 지금까지의 연구 경력/과)를 제출해야 한다. 트랙 레코드는 내가 왜 제안하는 연구를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과정이고, 그러니 관련된 연구를 많이 해왔고 그 분야 논문이나 책을 많이 써온 사람일수록 연구비를 받기에 유리하다. 연구비 신청할 때만이 아니라 책을 쓰려고 출판사 컨택을 할 때도 트랙 레코드는 중요하다. 새로운 책 제안서 혹은 출간 기획서를 쓸 때 기획서 안의 질문 중의 하나도 항상 저자의 트랙 레코드이다. 내가 왜 이 분야의 책을 쓰는데 가장 적합한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이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저명한 학자인가를 증명해야만 출판사에서도 나를 믿고 계약서를 써준다. 연구재단이나 학회, 학술지, 다른 학교, 회사 등등 어떤 단체나 조직과 어떤 식으로든 협업이나 컨설팅 일시작할 때도 트랙 레코드 요청은 항상 있다.  


나 같은 경우도 연구비를 따서 새로운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고, 책을 내고, 영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들의 연구재단들과 학술지들, 학회들의 심사위원으로 일하고, 영국의 디자인 재단의 전문가로 발탁되고, 나의 학회를 열고, 새로운 박사생들을 뽑고 하는  일련의 모든 연구 활동들에서 업싸클링 관련된 나의 트랙 레코드를 제출해 왔고 지금도 트랙 레코드를 더 길게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10년이 넘게 트랙 레코드가 쌓여버리니 여기서 내가 갑자기 이제 업싸이클링 연구를 그만한다고 치면, 고민이 되고 의문이 드는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내가 연구비는 어디서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박사생 장학금은 어디서 어떻게 받아다 줄 수 있을까? 논문은 어디에 내야 하나? 나의 연구자로서의 전문성과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새로운 분야를 지금부터 시작하면 그 새로운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추기까지는 얼마나 걸리는 것일까? 또 다른 10년인가?


평생이라는 당황스러움

내가 자진해서 열심히 판 구덩이가 너무 깊어져서 밖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것을 인지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도 3년 즈음되지 않았을까 싶다. 정확히 계기가 뭐였는지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 아? 어? 음? 하고 살짝 당황한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아, 3년 정도 전이면 코로나 시기와 겹치는  같기도 하다. 의료진과 방역 관련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 또한 정신없이 살다가 잠시 멈추는 것 같은 시간이 있었고, 그러니 (잡) 생각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의식적으로 깊이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던 시간이 따로 있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머리 한구석에 내가 하는 연구 분야에 대해 돌아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계속 연구해 온 분야인 업싸이클링에 대해회의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십수 년 전 회사 다닐 때 몸과 마음의 상태가 별로 안 좋고 아주 다크(dark)다크한 상태였을 때는, 내가 비싸고 예쁜 쓰레기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라는 점에 큰 회의감이 몰려왔었다. 혹시라오해하지 마시길. S사와 L사의 물건이 쓰레기라는 말이 전혀 아니다. 다만 내가 종사했던 분야가 핸드폰 사업어서 제품의 특성상 워낙 제품 교체 주기가 짧고, 많은 소비자들이 1-2년 만에도 멀쩡한 핸드폰을 버리고 조금 더 새로운 기술, 더 나은 기능, 더 예쁜 디자인의 더 좋은 핸드폰으로 갈아타니까 그 산업 자체가 쓰레기를 많이 만들어 낸다는 말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회사 다닐 때 느꼈던 회의감에 비하면 지금 느끼는 감정은 회의감보다는 그냥 순수한 당황스러움에 가까운 것 같다. 업싸이클링이라는 분야가 가치가 있어 보이고 재미도 있어 보여서 연구를 좀 해봤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평생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나 상상까지 하고서 시작한 연구는 아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들고 보니, 뭐라고? 우리가 앞으로 평생 같이 사는 거라고? 진짜? 뭐 그런 느낌이다. 내가 이 연구를 평생, 내내, 호호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계속하는 거라고? 정말? 내가 그렇게까지 이 연구를 좋아하나? 내 평생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열정과 신념

업싸이클링이라는 연구는 친환경 디자인, 순환경제, 저탄소 배출, 새로운 일자리 창출 등등 긍정적인 사회적 가치가 높은, 좋은 일이고 좋은 연구 주제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더라도 이 '평생'이라는 말이 걸리는 것 같다. 11년 전 박사를 시작할 때 거의 뭐 상황에 따라 우연에 가깝게 선택했던 연구 주제였던 것 같은데, 그게 나의 평생의 커리어를 좌지우지한다고? 이대로 이 연구만 계속하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10년 뒤, 20년 뒤, 혹은 퇴직한 후에 나의 커리어를 돌이켜보면서 전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떤 교수들을 보면 어릴 때부터 본인이 하는 연구를 하고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교수가 항상 꿈이었다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 나는 교수가 되기까지 내가 진짜 교수가 되고 싶었는지도 몰랐었는데, 교수가 되고 나니 (그것도 되자마자도 아니고 몇 년 지나고 나니) 교수라는 직업 나쁘지 않군, 괜찮네, 싶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연구에 대해 엄청난 열정이 있다거나, 확고한 신념이나 확신 같은 것은 없다. 이런 어정쩡한 마음으로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혹시 연구에 대한, 내 연구 분야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쩌면 내가 무언가 다른 연구를 한다면, 정말 내가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면, 그러면 지금보다 더 보람차고 즐겁고 신나는 연구 생활을 할 수 있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에게, 내 인생에 그렇게 중요한가? 평생이 걸리더라도,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해결하고 싶은 내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은 무엇인가? 아, 역시 잘 모르겠다 (긁적긁적).


연구비가 무한하다면

나라는 사람은 특정 연구에 대한 엄청난 열정이나 신념 같은 것은 없는 사람인 거 같으니, 연구비가 무한한 어떤 상상의 나라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 상상의 나라에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내가 무슨 연구를 하든 모든 비용을 대고 필요한 모든 시설과 인력을 제공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무슨 연구를 하고 싶을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그냥 순수하게 내가 더 알아보고 싶은 것, 더 세상에 알려주고 싶은 것만 생각하자면, 나라는 개인, 인간으로서의 나, 나의 개인적 삶과 일상생활들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그런 연구를 하고 싶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동양인 여자로 영국에서 이민자로 사는 삶의 어려움들과 해결책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영국의 곳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동양인 이민자 여성분들과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데이터를 수집하면 재밌을 것 같다. 혹은 전 세계 학계의 여자 교수들의 고충과 성공사례 연구를 하면서, 전 세계 대학교들을 방문하여 학계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여교수님들과 인터뷰를 하는 것도 아주 신나고 좋을 것 같다. 전 세계 곳곳에서 이민자로 사는 한국인들의 나라별, 지역별 어려움들 비교 연구 같은 것을 하면, 나라별로 어떤 법과 규제들이 좋고 나쁜가, 인종차별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겪는 공통적인 경험은 무엇인가, 그래서 결론적으로 한국인이 이민 가기에 가장 좋은 나라는 어디인가 등등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유익하고 재밌을 것 같다.   


혹은 그냥 귀엽고 예쁘고 아름답고 기분 좋은 그런 연구들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것들이나 가장 귀여운 생물들에 대한 연구를 해서, 예를 들어 어떤 아기 고양이 사진들과 비디오들이 가장 귀여운가 비교를 하고 사람들의 귀여움 인지도 같은 것을 측정하여 궁극의 귀여운 사진과 비디오 제작 같은 것을 한다면 매일 연구가 행복할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 (경치, 사람, 동물, 식물, 예술작품, 제품 등등)에 대해 미학적, 철학적 고찰을 한다거나, 아름다움의 백과사전 같은 것을 만들어 출판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기분이 항상 좋은 주거 환경, 업무 환경, 조경, 도시 계획에 대한 연구 같은 것을 하면서 막 대단한 건축가들, 조경사들, 도시 계획자들과 협업을 해서 이 지구 어딘가에 '항상 기분이 좋은 마을' 같은 것을 만들면 진짜 신날 것 같다. 국민들이 낸 소중한 세금을 써서 하는 연구가 아니니까, 왠지 좀 쓸데없고 재미난 그런 디자인을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원래 디자인은 항상 소비자를 고려하고, 인간을 위하고, (환경을 위하고) 시장을 고려하고, 팔릴 것을 생각해서, 인간과 사회와 (환경과) 경제에 유익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던가. 연구비가 무한하다면 그렇게 항상 하는 유용한 디자인이 아닌, 그다지 유용하진 않지만 허를 찌르는, 깜짝 놀라게 재미난 그런 디자인을 해서 디자인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그어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 근데 누가 나한테 연구비를 줄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과 상상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있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또 세상 일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니까. 언젠가 혹시라도 돈이 넘쳐나서 주체가 안되어 고민이신 어느 독지가님이 나한테 연구비를 주고 싶어 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자 독지가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앞으로

다시 말하지만 지금까지 해온 업싸이클링 연구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지금까지 계속 나름 재미있게 연구를 해오고 있고, 이 분야의 전문성을 갖추고 전문가로 인정을 받는 것도 뿌듯하고, 몇몇 박사생들이 같은 분야에서 같은 고민을 같이 해주고 다 같이 으쌰으쌰 연구를 하니까 좀 더 신이 나는 그런 것도 있다. 단지 평생이라 생각하면 당황스럽고, 앞으로 20년 더 이 분야만 연구를 한다면 나중에 전혀 후회하지 않을까에 대한 자신 없다. 그래서 현실적인 대안책은, 어떤 분야의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예비 박사생이든 나는 다 받는다. 박사란 어차피 연구를 하는 과정과 방법을 배워서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는 수련 과정이고 운전면허를 따는 것과도 같으니, 내가 모두의 박사 연구 주제의 전문가여야만 논문 지도를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내 박사생들을 통해서 내가 해보지 않은, 하지 않는 연구들에 대해 다양하게 배우고 간접 경험을 많이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엄청나게 열정을 느끼고 신념을 가득 담아 할 수 있는 연구 분야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어떤 운명 같은 연구 주제를 만나게 될 때까지는 아마도 계속 업싸이클링 연구를 하면서 더 길고 긴 트랙 레코드를 쌓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어느 날 내가 혹시라도 전 세계적으로 아주 저명한 업싸이클링 연구의 대가 같은 것이 되어서 텔레비전에라도 나온다면, 쯧쯔쯔, 아직까지 운명 같은 연구 주제는 못 만났구먼, 하고 생각하시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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