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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추암 촛대바위 : 신의 작품, 인간이 완성한 이름

이 바위를 본 순간, 인간은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by 타이준


자연이 촛대를 만들 의도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인간이 촛대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 풍경이 완성된 것일까요? 자연이 창조하고, 인간이 해석하여 이름을 붙이는 과정.


신의 작품에 인간의 상상력이 덧입혀진 순간, 그 공간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하나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암 촛대바위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해안을 따라 여행하던 중,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사진으로 보았지만 직접 가 보지 않은 이곳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해암정 : 선비가 바라보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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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촛대바위로 가는 길, 해암정에 잠시 앉아 바다 소리를 들었습니다. 거센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이를 품어내는 바다의 깊은 숨결. 이 정자는 고려 말,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며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해암정이 처음 지어진 것은 고려 공민왕 시대이며, 조선 중종 때 그의 후손인 심언광이 다시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심동로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했으나, 고려 말의 혼란한 정국을 바로잡으려다 간신배들의 눈 밖에 났습니다. 결국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고, 왕은 이를 만류했지만, 동쪽으로 가는 노인이라는 의미의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려주며 떠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가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파도는 그의 시대에도 이렇게 끊임없이 밀려왔을 것이고, 그 역시 이 바다를 보며 많은 고민을 했겠지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자연 속에서, 한 인간의 선택과 삶의 무게가 떠올랐습니다.



촛대바위 – 신의 손길이 만든 조각, 인간이 완성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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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암정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마침내 촛대바위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름 그대로 촛불을 켠 촛대처럼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신이 의도하고 만든 형상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촛대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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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애국가 영상에도 등장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풍경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화면 속에서 보던 모습보다 실제로 마주한 촛대바위는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바람과 파도가 다듬어 만든 조각품. 자연이 만든 작품이지만, 인간이 이름을 붙이고 해석함으로써 그 의미가 완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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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뒤쪽으로는 작은 정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이 남한산성의 정 동쪽 방향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남한산성을 방문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곳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강한 성벽, 그리고 이곳의 바다와 촛대바위.


전혀 다른 장소이지만, 어딘가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은 글귀 하나가 공간을 넘어 기억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끊임없이 깎이고 조각되는 바위 – 자연의 조각가, 파도

촛대바위를 내려와 해변에 섰습니다. 발밑으로 밀려왔다가 사라지는 파도, 그리고 저 멀리 다시 몰려오는 물결. 이 파도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여기에 거대한 조각가가 있다면, 그것은 파도일 것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한결같은 힘으로 바위를 깎아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오직 자연의 힘만으로 조각된 이 풍경. 그러고 보면, 촛대바위도 결국 파도가 빚어낸 작품인 것입니다.


추암 조각 공원 – 인간의 상상력이 덧입혀진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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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해변을 떠나 뒤쪽에 낮은 언덕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조각 공원이 있습니다.


신의 작품을 감상한 뒤 만나는 인간의 작품들. 마치 자연의 거대한 조각과 인간의 작은 창작물이 대비를 이루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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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각 공원이 의도한 것이 ‘신의 작품과 인간의 상상력’의 조화였을까요? 자연이 창조한 기암괴석과 사람이 만들어낸 조각품들이 한 공간에 놓여 있으니,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는 거 같았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모방하고, 또 해석하며 새로운 창작을 만들어내는 거니까요.


자연과 인간 : 조화의 현장

자연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해석을 더합니다. 촛대바위가 단순한 바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풍경이 된 것도, 결국 인간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파도를 바라보았다. 자연은 흐르고, 인간은 해석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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