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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신 최치원이 있는 곳 : 함양 최치원 역사공원

천년의 스승, 공부의 신 최치원을 만나는 곳

by 타이준

함양 최치원 역사 공원은 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최치원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함양은 고운 최치원이 태수로 부임한 후 근무한 곳으로 함양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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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신,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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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신라 헌강왕 원년(857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학문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네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열 살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다고 전해집니다.


12세의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외국인이 응시할 수 있는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18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며 천재적인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당나라 조정에서 관직을 수행하며 '인백기천(人百己千), 남이 백 번을 하면 나는 천 번을 한다'는 각오로 노력했다고 합니다. 특히, 황소의 난 당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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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던 고병이 실각하고 더 이상 길이 없다 느낀 최치원은 귀국하여 신라에서 관직을 맡게 됩니다. 함양, 서산 등 여러 지역에서 태수로 재직하며 개혁을 시도했지만, 당시 신라 또한 당나라처럼 쇠퇴하는 과정에 있었고, 그의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좌절한 최치원은 결국 관직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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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벽을 넘을수 없었던 개혁가


최치원은 신라에서 왕족인 진골 다음으로 높은 신분인 6두품 출신이었습니다. 6두품은 신라 사회에서 기득권층이었으며, 학문과 능력을 갖춘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철저한 신분제 속에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벼슬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진골 귀족들만이 핵심적인 정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학문과 개혁 의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능력이 있음에도 뜻을 펼치지 못한 그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아무리 뛰어난 한 개인이라도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역사의 변화는 한 개인이 아닌, 시대의 힘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최치원의 생애가 보여줍니다.


최치원 역사공원 입구 – 고운기념관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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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고운기념관최치원 동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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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기념관에서는 최치원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하는 전시물이 마련되어 있으며, 신라 의복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됩니다. 방문 당시에는 주말체험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고, 역사 해설과 다양한 체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상림공원을 내려다보는 고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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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지나 고운루에 오르면 상림공원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함양군 문화예술회관과 함양박물관도 조망할 수 있어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신라 시대의 숨결을 간직한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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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 내부에는 최치원의 일생을 기록한 문헌, 계원필경집, 그리고 그가 남긴 다양한 학문적 업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미디어 자료를 통해 보다 쉽게 최치원의 생애를 이해할 수 있으며, 민속놀이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어린이들에게도 흥미로운 체험을 제공합니다.


전국 곳곳에 남은 최치원의 흔적


최치원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전국 곳곳에 그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을 만큼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경남 지역에는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 해운대라는 지명은 최치원이 직접 붙인 이름입니다. 그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하며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을 따서 해운대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해운대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성장했으며, 그의 이름이 현대까지도 남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마산 월영동: 경남 창원의 월영동(月影洞)이라는 지명도 최치원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는 마산에서 지내던 중 월영대(月影臺)라는 정자에서 달을 감상하곤 했는데, 이곳이 현재의 월영동으로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합천 가야산 해인사: 최치원은 지리산뿐만 아니라 가야산 해인사에도 머물렀던 기록이 있습니다. 해인사에는 그가 남긴 시와 흔적이 남아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학문과 정신이 기려지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최치원과 관련된 설화나 유적지는 전국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의 발자취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지역 문화에 스며들어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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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역사 속에서 사색하는 시간


최치원 역사공원은 그의 사상과 정신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상림공원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천년 전 선비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남긴 흔적이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천재였지만, 시대를 뛰어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유산은 후대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까지도 그의 사상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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