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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황제가 남긴 카페 : 춘천 이디오피아 집

황제가 남긴 커피의 향기

by 타이준

강원도 춘천 공지천.

하늘과 강이 맞닿은 그 조용한 길가에 ‘이디오피아 집’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작은 커피집이 있습니다.


생긴 건 평범하지만, 이곳에는 전쟁과 우정, 그리고 황제와 병사들이 남긴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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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왜 한국을 도왔을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단 하나의 명분으로 한국에 군대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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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해 싸우는 형제국을 외면할 수 없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나라였고, 그중에서도 셀라시에 황제가 직접 선발한 최정예 근위대 ‘강뉴 부대’는 253번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전설적인 부대였습니다.


그들은 자국 병사의 시신까지 전부 수습하여 돌아갔고, 1956년까지 한국에 주둔하며 비무장지대 순찰과 전후 복구까지 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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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황제가 남긴 커피의 향기


1968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방한했을 때 그는 춘천에 있는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비를 찾아 헌화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 우정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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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뜻을 기리기 위해,


춘천의 한 부부가 사비를 들여 근처에 작은 커피집을 지었습니다.


황제는 기뻐하며 ‘이디오피아 벳(Bet)’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직접 황실에서 즐겨 마시던 생두를 외교행랑을 통해 보내주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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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한국 최초의 로스터리 카페, 그리고 황제의 이름이 남은 유일한 공간이 춘천의 강둑가에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렇게 아름답게 이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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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에티오피아는 쿠데타로 공산화되었습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궁에 유폐되어 이듬해 침상에서 목 졸려 살해되었고, 그의 유해는 17년 동안 화장실 바닥 아래 콘크리트 밑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가슴 아픈 사실은, 한국전 참전에 참여했던 강뉴 부대 병사들 역시 ‘제국의 하수인’으로 낙인찍혀


수십 년 동안 사회에서 소외되고, 연금도 끊긴 채 살아야 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 한 나라를 구했지만, 고국에서는 오히려 불이익과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다시 피어나는 기억, 그리고 존경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에티오피아 국내에서도 이들의 명예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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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원과 교류도 점점 확대되었고, 춘천의 ‘이디오피아의 집’은 다시 사람들로 북적이며 이야기를 간직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입구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초상화, 실내에는 전통 로스터와 황제의 휘장, 그리고 지금도 매일 내려지는,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프 원두의 향기로운 커피 한 잔.


커피는 그냥 커피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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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는 그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습니다.


이 커피는 한 황제가, 한 나라가, 그리고 한 시대가 남긴 인사였습니다.


역사와 정치의 소용돌이에 의해 사라졌던 기억이 이제 와서야 다시 복원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면서도 다행스럽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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