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에스토니아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소
에스토니아의 역사는 고대부터 나라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고대에는 우랄 민족 에스토니아인의 땅이었고 그들은 발트족과 교류하며 지냈다. 13세기에는 독일의 기사단에 정복되어 기독교화되었고 이후 덴마크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17세기에는 스웨덴령이 되었다. 18세기부터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며 잠시 독립이 되었다. 하지만 소련과 나치독일의 밀약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가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다시 독립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간략하게 설명만 해도 매우 복잡한 역사다. 그런 에스토니아의 복잡한 역사를 한 번에 알려주는 곳이 탈린에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지금부터 소개할 곳은 탈린 국립묘지다.
국립묘지 위치는 탈린 시내와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그렇게 멀지는 않다. 버스를 타고 대략 20~30분 정도 걸리는데 갈아탈 것 없이 한 번에 도착 가능하다. 국립묘지 바로 앞에 버스가 내리니 찾기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국립묘지 입구다. 에스토니아어,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무려 4개 국어로 적혀있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이 묘지에 안장된 사람들을 분류하자면 1차 세계대전 전몰장병, 에스토니아 독립유공자,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지원 영국군 전사자, 2차세계대전 소련군 전사자, 2차세계대전 독일군 전사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다.
비석들이 낮게 솟아 있다. 그나마 며칠 사이에 비가 내려 녹아서 이렇게 비석의 모습을 완전히 볼 수 있었다. 눈이 많이 오면 완전히 파묻혀서 볼 수 없을 거 같았다. 묘지 전체 부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대략 고등학교 운동장 정도 크기 정도였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을 지원했던 영국 해군 전사자의 무덤이다.
전몰자 추모 건물이 가운데 있다. 한국의 현충원처럼 분향을 하는 곳은 없지만 많은 꽃송이가 제단에 놓여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독일군과 소련군의 무덤이 좌우로 나뉘어 있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부는 독일군에 가담하여 싸웠고 일부는 소련군에 가담하여 싸웠다. 같은 나라 사람이었지만 서로 총을 겨누고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목숨이 다한 뒤에야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니 그런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아 슬퍼졌다.
국립묘지 가운데 있는 청동 병사상이다. 사실 이 동상은 소련군의 전승 기념 동상으로 원래 동상의 이름은 탈린 해방군 동상이다. 원래 위치도 이곳이 아닌 시내 중심에 있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치하에 있던 에스토니아를 해방했다고 소련군이 세운 동상이다. 2차 세계대전 초기(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소련 침공 이전)에는 소련과 독일이 밀약을 맺어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였다. 그러다가 전쟁을 거치며 독일군 점령과 소련군의 점령을 번갈아 가며 거쳤다. 이 때문에 에스토니아 국민은 거의 반으로 갈라져 싸우게 되었다. 결국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승리하며 최종적으로 소련의 지배하에 놓였고 1991년까지 지속되었다. 에스토니아에 원래 살던 국민 입장에서는 소련 치하에서도 수많은 억압을 당했기에 결코 소련군을 `해방군` 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강력한 소련 통치하에는 이런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지만 1991년 국민투표를 통해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한 이후 소련 치하의 강압 통치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던 중 2007년경 이 동상의 처우를 놓고 에스토니아인과 그리고 소련 시절 이주해온 러시아계 주민들과의 마찰이 생긴다. 에스토니아인들은 에스토니아 민족의 학살자를 상징하는 이 동상을 당장 철거해야 한다고 하였고 러시아계 주민들은 독일 파시스트로부터 에스토니아를 해방한 영웅들의 업적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논쟁은 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에스토니아 정부는 동상과 소련군의 유해를 탈린 외곽의 지금 이곳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결정은 에스토니아 주민에게도 러시아계 주민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러시아계 주민들은 시 외곽으로 이전하는 것은 사실상 철거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에스토니아 주민들은 독립유공자와 소련 침략자들을 같은 국립묘지에 안장한다는 것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각자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도심에는 시위대가 결집했고 양측 시위대 사이에 유혈 충돌까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다치고 천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 사건을 `청동의 밤`이라고 부른다.
이후 크고 작은 충돌들이 있었지만, 에스토니아 정부에서는 양측을 끝없이 설득하였고 러시아 측에서 보낸 대표단이 이전된 동상에 참배하고 이장한 국립묘지를 일반에 공개하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스토니아 내의 반러감정이 심해져 동상의 완전 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에스토니아 정치권에서는 철거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2022년 4월에 동상의 구조물 일부가 절단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 러시아 대사가 직접 동상의 상태를 확인하고 참배하고 갔다고 한다. 이런 민족적 갈등이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심해지고 있어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볼 것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답사였다. 복잡한 에스토니아의 역사와 지금의 현실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