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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 미스터 선샤인과 김수환

드라마 세트인 줄 알았죠? 실제 건물입니다 –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by 타이준

대구 중구 남산동.


작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의 문을 지나듯 유럽풍 붉은 벽돌 건물 하나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곳이 바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 대구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이자, 한국 천주교사의 숨결이 서린 유서 깊은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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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을 길러낸 뿌리

이곳은 대한민국 최초의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이 젊은 시절 공부했던 신학교로도 유명합니다.


1930년대, 아직 ‘추기경’이라는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 그는 이곳에서 라틴어와 신학,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향한 신앙의 눈길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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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스티노신학교는 그 자체로 한국 가톨릭 인재의 산실이었습니다.


사제 양성을 넘어, 한 인물을 통해 한 시대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장소였죠.

김수환 추기경의 시작이 이곳이었기에, 이 건물은 단지 오래된 벽돌 건물 그 이상으로 다가옵니다.


대구 천주교의 근대 출발점

성유스티노신학교는 1914년, 프랑스 출신 안세화(드망즈) 주교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중국 상하이의 익명의 신자가 보낸 헌금과 대구의 서상돈이 기증한 땅 위에 세워졌고, 프랑스 영사관 건축에 참여했던 목수와 중국인 기술자들이 손을 보탰습니다.


건물은 좌우대칭의 2층 구조에 붉은 벽돌 외관,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케이드 복도, 그리고 중앙 종탑을 갖춘 웅장하면서도 절제된 미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100년 넘게 대구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이 건물은 건축사적으로도 대구 근대 벽돌 건축의 본보기로 평가받습니다.


3·1운동, 신학생들의 조용한 봉기

이 평화로운 성당에서, 1919년 3월 대구·경북 지역 최초의 3·1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성유스티노신학교의 신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독립가를 부르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며,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복사해 만세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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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위 계획은 교장 신부에게 발각되어 무산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학생들에게 정치 문제 개입을 경계시켰지만, 청년들은 그 선을 넘어 현실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신앙과 민족의식이 부딪히는 그 한복판, 이 건물은 두 믿음 사이의 고뇌를 조용히 간직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미스터 션샤인 속 그 장소, 실제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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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주인공 유진 초이가 군사재판을 받는 장면의 배경으로도 등장했습니다.


드라마 속 묵직한 분위기, 햇살이 가만히 떨어지는 붉은 복도,

정적 속에서도 무너질 듯 단단한 공기. 그 모든 감정은 연출이 아니라 실제 공간이 지닌 힘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소품도 세트도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시대를 증언하는 건축물이었습니다.


지금은 신학대학, 여전히 신앙의 중심

신학교는 일제 강점기 말기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못해 1945년 강제 폐교되었고, 해방 후에는 대건중고등학교 교사로 쓰이다 1991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이곳으로 이전하며 현재까지 신학 교육의 요람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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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상당수는 철거되었지만, 중앙 성당부는 남아 보수되었고, 1990년에는 대구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호받으며 역사적 상징성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습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남은 벽돌 사이의 공간

성유스티노신학교는 김수환 추기경의 시작이자, 대구 가톨릭의 뿌리이며, 3·1운동의 숨은 현장이자, 지금도 절대자를 부르며 살아가는 이들의 공간입니다.


한때는 총칼 앞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또 한때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길을 떠난 청년이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이야기들이 조용히 벽돌 사이의 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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