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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 고구려가 충주까지?

조용한 들판 한가운데, 고구려가 서 있었습니다

by 타이준

“충주에 고구려의 흔적이 있다.”


처음 들었을 땐 좀 의외였습니다. 고구려 하면 광개토대왕비나 북한 압록강 근처, 혹은 만주를 먼저 떠올렸던 저에게


‘충주’라는 말은 고구려보다는 신라나 백제 쪽 이미지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충주에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비석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충주 고구려비, 예전에는 중원군에 있어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불렸습니다. 사실 이 이름이 익숙하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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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도, 전시관도 소박한데 괜히 가슴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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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한적한 국도 옆 작은 언덕 같은 곳에 전시관이 있습니다.

비석 하나를 보기 위해 세워진 건물치고는 꽤 단정하고 정갈했습니다.


처음엔 ‘이런 게 왜 국보지?’ 싶을 정도로 크기도 작고 눈에 확 띄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앞에서 마음이 들떴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은 익숙했지만 늘 사진으로만 봤던 그 비석이 지금 눈앞에 서 있었거든요.



사진으로 본 것보다 작았지만, 실감은 훨씬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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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은 유리 벽 안쪽에 조명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었고, 4면 중 일부에만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잘 안 보였습니다.

글자라는 게 이렇게도 닳는구나 싶을 정도로, 시간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어쩐지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나는 정말 여기 있었다"라고 말하듯, 조용히, 아주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교과서 속 문장을 현실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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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시간에 “충주 (중원) 고구려비는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라는 문장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그냥 시험을 위해서 외워야 하는 교과서 내용이었지만, 막상 진짜 그 비석 앞에 서 보니 ‘기록’이 아니라 ‘사람들의 숨결’처럼 느껴졌습니다.


광개토대왕이든 장수왕이든, 누군가는 이 비석을 세우기 위해 말을 달렸고, 또 누군가는 수백 년 동안 이 비를 돌로만 기억하고 살았죠.



정말 빨래판으로 썼다는 소문은 진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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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비석이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루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장 설명을 보니 마을 사람들이 무슨 돌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왠지 범상치 않은 돌이라 여겨 오히려 소중하게 다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비석이 항상 잘 보존된것 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엔 대장간 기둥으로 쓰인 적도 있었다는데, 그걸 알고 보니 마모된 자국 하나까지도 그저 낡은 게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쳐져 새겨진 사람의 주름살 같았습니다.



작고 조용한 공간에서 배운 건, ‘돌이 아니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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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자체는 크지 않았고, 전시관도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서 나오는 길, 뭔가 새로운 감정이 남았습니다.


단순히 “오, 여기가 고구려비구나”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이름도 없는 사람들의 시간이, 말 없는 돌에 고스란히 새겨졌다는 걸 알게 되니까 내가 지금까지 배운 역사 속 주인공들이 전부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은 큰 게 아니라 오래 남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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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제가 찍은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았고, 인터넷에 올릴 만한 화려한 장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행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돌 앞에서 제가 했던 생각들 ‘시간’, ‘기억’, ‘사람’, 그리고 ‘말’


그것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조용히 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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