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두 명 나온다더니, 결국 나라까지 흔들린 무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그날은 딱히 목적지 없이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차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작은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연군묘’. 이름은 낯설지 않았지만, 실제로 가본 적은 없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오페르트 도굴 사건’.
머릿속에 그런 키워드들이 떠올랐고, 호기심에 차를 돌려 그 길로 들어섰습니다.
무덤이 자리한 언덕 아래에 도착하니, 주변은 공사 중이었습니다.
석축을 다듬고 진입로를 보수하고 있었으며, 가야사지 유적의 발굴 작업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주말이라 인부 한 명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관람은 제한되지 않았고 통행할 수 있도록 임시 진입로가 마련돼 있었습니다.
언덕을 오르기 전,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조용한 공간에, 과연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언덕을 오르니, 점점 주변이 고요해졌습니다.
바람 소리만 들리는 언덕 꼭대기.
그곳에 남연군의 묘가 단정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묘 앞 석등에는 “二代天子之地(이대천자지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두 황제가 날 자리’라는 뜻.
실제로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자, 고종 황제의 조부입니다.
처음엔 그저 고요한 산자락 위에 자리한 평범한 무덤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훗날, 조선 말기를 뒤흔든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 서게 됩니다.
풍수지리에서는 이 자리를 ‘천하의 명당’이라 칭했지만, 한편으로는 불길한 예언도 남겼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은 화를 입고, 나라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말처럼, 남연군은 생전보다 사후에 더 큰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이 무덤을 도굴하려 시도했습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
조선을 충격에 빠뜨렸던 그 일은 교과서에서 짧게 스쳐 지나간 사건이었지만, 막상 이 자리에 직접 서보니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죽은 자의 무덤조차 파헤치려는 자들과 어떻게 수교를 논한단 말인가.’
그 시대의 분노와 불안이 피부로 전해졌습니다.
도굴을 막기 위해 무덤은 강회(석회를 섞은 흙)로 단단히 다졌고, 철을 만 근이나 부어서 덮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만큼 이 자리에 대한 후손들의 집착과 기대, 두려움이 컸던 것이겠지요.
이곳은 원래 99개의 암자를 가진 대형 사찰, 가야사가 있던 자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제가 날 자리’라는 풍수사의 말에 절은 불태워지고, 금탑까지 헐렸다고 하지요.
그 순간부터 이 언덕은 더 이상 조용한 자연이 아닌, 권력의 기억을 품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덩그러니 놓인 무덤, 공사장 너머로 펼쳐진 하늘, 그리고 먼지 날리는 산길.
모든 것이 조용했지만, 그 고요함 속엔 ‘죽은 뒤에 오히려 더 큰 이야기를 남긴 한 사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돌아가는 길, 저는 한 번 더 무덤을 바라보았습니다.
“두 황제가 난 명당이라 했지만, 결국은 역사 앞에서 가장 쓸쓸한 자리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예산을 여행하시거나 이 일대를 지나신다면, 이 조용한 언덕 위 무덤에 잠시 들러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화려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조선 왕조의 마지막 그림자와 시대의 균열이 담긴 이야기들이,
그곳엔 아직도 고요하게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