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기 격납고였던 회색 돔 이제는 박물관으로 태어나다
비가 섞인 눈이 천천히 내리던 아침, 저는 탈린 구시가지를 벗어나 버스에 올랐습니다. 목적지는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 차가운 철골 구조물이 우두커니 자리한 탈린 해양박물관이었습니다.
수상기 격납고였던 회색 돔.
한때 러시아 제국과 소련이 이 땅을 점령했을 때, 북해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이었던 그곳은 지금은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2월의 발트해.
녹다 만 눈이 도로 위에서 바스락거리고, 이따금 스산한 바람이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 날씨 속에서 찾은 이 박물관은 첫인상부터 강렬했습니다. 높고 둥근 천장 아래, 수상기와 대포, 바다를 품은 장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냅니다.
무기들이 늘어선 공간을 걷다 보면, 해양을 둘러싼 에스토니아의 오랜 시간이 떠오릅니다.
제복, 통신 장비, 바다 위에 세운 무역과 군사 전략들. 물살 위에서 존재감을 증명해낸 이 작은 나라의 기억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주한 ‘렘비트(Lembit)’ 잠수함.
영국에서 건조돼 에스토니아 해군의 심장처럼 활동했던 이 잠수함은 지금 육지 위에 놓여,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해치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숨소리가 괜히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그 좁고 복잡한 통로들,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긴장하며, 또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을지 상상해봤습니다.
어쩌면 이 작은 철제 구조물 안에서 수많은 나날이 생존과 침묵으로 채워졌을 것입니다.
그 막막한 바다 속에서 적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단 한 발의 어뢰로 전투의 흐름을 바꿔야 했던 긴장의 연속.
쇄빙선, 얼음을 가르던 시간
박물관을 나서면 바깥에는 또 하나의 전시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14년 폴란드에서 건조된 쇄빙선.
발트해의 혹독한 겨울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던 이 배는
이제 정박한 채로 과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내부는 실제로 들어가 볼 수 있었고, 오래된 항해일지, 선실, 기계실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발트해가 주는 풍경
그날도 하늘은 흐렸고, 바닷바람은 매서웠습니다.
하지만 발트해를 바라보며 느꼈습니다.
이곳은 날씨와 상관없이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라는 것을요.
탈린 해양박물관은 이 땅이 겪은 전쟁과 점령, 그리고 그 속에서도 이어진 바다에 대한 기억을 말없이 전해주는 곳이었습니다.
버스에 올라 다시 시내로 돌아가는 길.
창밖으로 보이던 회색 바다의 풍경이, 유독 선명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