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도시, 겨울의 리가
에스토니아에서 여행을 마치고 다음 여정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였습니다.
그 겨울, 도시 위로 내린 눈은 조용했고, 공기는 차갑게 맑았습니다.
그곳에 발을 디딘 순간, 저는 직감했습니다. 이 도시는 웃음소리를 크게 터뜨리는 법이 없는 곳이라는 것을.
뉴욕이 ‘야망’, 라스베가스가 ‘욕망’, 파리가 ‘로맨스’라면, 리가는 제게 “침묵”이었습니다.
고요하고, 그 고요가 단단히 오랫동안 쌓여 있는 느낌.
수백 년 동안 겹겹이 덮인 시간과 이야기가, 함부로 손댈 수 없게 도로와 건물 틈새에 숨어 있었습니다.
리가의 중심부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성 페트로 교회였습니다.
회색 하늘을 찌르듯 솟아오른 고딕 양식의 첨탑. 그 끝에 서면 도시 전체가 발아래 깔립니다.
햇빛이 스치면 붉은 지붕들이 온기를 띠었고, 구름이 덮이면 금세 색을 잃은 채 차가운 회색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같은 도시가 하루에도 몇 번씩 표정을 바꾸는 광경.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아니라, 빛이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성당 앞, 눈 위에 묻혀 있던 한 동상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당나귀, 개, 고양이, 닭이 차례로 포개진 모습. 독일 전래동화 ‘브레멘 음악대’의 주인공들입니다.
1201년, 브레멘 출신 알베르트 대주교가 이 땅에 상륙해 기독교를 전한 인연을 기념해 브레멘시가 기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작은 동상 하나에도, 도시의 시작을 기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성 페트로 교회 근처에는 검은머리 전당이 서 있습니다.
광장 한가운데, 롤랑의 동상이 서 있었죠.
중세 기사도 문학 ‘롤랑의 노래’의 주인공이자 카를로스 대제의 12 기사 중 한 명.
이 동상은 리가의 ‘도로 원표’로, 이곳에서 다른 도시까지의 거리를 잴 때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전당은 중세 상인조직 ‘검은머리 길드’의 본거지였습니다.
이름은 수호성인 모리셔스와 이집트 출신의 흑인 성인의 초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들은 상인이었지만 동시에 무장을 갖춘 전사 집단이었고, 건물 지하에는 교역품뿐 아니라 검, 석궁, 대포가 전시돼 있었습니다.
그 많은 유물 중 제 발길을 멈추게 한 건, 길드 마스터가 회원들에게 나눠줬다는 장식 담뱃갑이었습니다.
하나하나 모양과 그림이 달랐고, 금속 표면 위에 세월이 얹힌 듯 빛나고 있었습니다.
담배는 피지 않지만, 이건 손에 넣고 싶은 물건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니까요.
회의실은 벽화와 장식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곳에서 벌어졌을 협상과 음모, 결의와 배신까지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지하실에는 길드의 저울이 전시돼 있었는데, 교역품의 무게를 달아 손가락 반 개의 오차가 나면 팔 하나, 손가락 한 개 정도면 목을 내놔야 했다는 규율이 있었다고 합니다.
장사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생과 사의 경계 위에서 살벌한 거래가 이루어졌던 셈입니다.
리가를 걸으며, 저는 왜 이곳을 ‘침묵의 도시’라 불렀는지 다시 느꼈습니다.
이곳의 고요함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세월과 사건이 눌러 만든 무게였습니다.
눈 덮인 광장은 말없이 서 있었고, 바람은 오래된 건물의 틈새를 스치며 과거의 온도를 품어 나르듯 불었습니다.
여행지의 감정이 꼭 설렘일 필요는 없습니다.
겨울의 리가는 제게, 오래 남는 감정이란 무엇인지 보여준 도시였습니다.
그 감정은 지금도 제 마음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