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라트비아 리가, 시간 위를 걷다
침묵의 도시 리가는, 겨울에 그 침묵이 한층 더 깊어집니다.
발트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좁은 골목을 파고들고, 지붕 위에 쌓인 눈은 바람의 손길에도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날, 저는 오래 쌓인 시간 속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습니다.
1201년, 알베르트 대주교가 세운 리가 돔 성당은 전쟁과 화재, 그리고 재건을 거치며 모습을 바꿔왔습니다. 고딕 양식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이어지는 흔적이 한 벽면 안에 공존하고 있었고, 서로 다른 시대의 언어가 한 문장으로 이어진 듯했습니다.
벽돌 하나하나에는 미묘한 색의 차이가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스며든 겨울 햇빛이 벽면을 따뜻하게 감쌌습니다. 그 빛 속에서, 마치 수백 년 전 이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좁은 골목 한쪽에 작은 아치형 문이 있습니다. 스웨덴이 리가를 점령하던 시절에 남긴 흔적입니다.
장식은 소박하지만, 그 너머로 이어진 구시가지는 한때 이방인 군대의 부츠 소리로 가득했을 겁니다.
이제는 커피 향과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죠.
얼어붙은 돌바닥을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얇게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15세기, 16세기, 17세기에 지어진 세 채의 집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흰색의 견고한 외벽을 가진 첫째, 상아색으로 단정한 둘째, 연한 초록빛의 막내가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100년의 나이 차이는 형제라 부르기 어려운 간극이지만, 건축물에게는 충분히 가족이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창문 너머로 이 도시를 내려다보며,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 보였습니다.
도심을 벗어나 드비나 강가로 향했습니다.
13세기 리보니아 기사단 시대에 세워진 리가 성은 스웨덴과 러시아, 독일을 거쳐 지금은 대통령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하얗게 칠해진 성벽 아래에는 수많은 점령과 저항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겨울 강바람이 성벽을 스칠 때, 그 바람 속에는 권력의 차가움과 무게가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 광장에 우뚝 선, 높이 40미터의 자유기념비.
1935년,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졌고, 여신이 높이 치켜든 세 개의 별은 라트비아의 세 지역이 하나로 합쳐진 자유를 뜻합니다.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서도 기념비는 미동도 없었습니다.
그 모습은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조용한 맹세 같았습니다.
리가의 구시가지는 화려한 장식보다 세월의 결이 더 진하게 남아 있는 도시입니다.
성당의 벽돌, 스웨덴문의 돌바닥, 삼형제 건물의 창문, 강변의 성벽, 하늘을 향한 기념비.
이 모든 곳에서 느껴지는 건, 한 도시가 수백 년 동안 버텨온 시간의 밀도입니다.
리가를 걷는다는 건 오래된 책을 한 장씩 넘기듯, 도시가 품은 이야기들을 직접 읽어 내려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겨울, 그 차갑고 맑은 공기 속에서야 비로소 그 글씨가 또렷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