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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폭설 트래킹 도전기 : 투라이다 성에 다녀오다

눈길을 뚫고 사랑의 동굴과 투라이다 성에 가다

by 타이준

시굴다, 눈길 위의 하루


리가에서 북동쪽으로 약 1시간 30분.

아침부터 부지런히 나서야만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도시가 있습니다. 바로 시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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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라트비아는 예측 불가능한 계절이었습니다.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고, 오늘 하루 종일 걸을 생각을 하니 왠지 고생길이 펼쳐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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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미리 버스표를 예매해 두었는데, 정해진 시간이 되어도 버스가 오지 않았습니다. 눈 때문에 취소된 걸까? 아니면 사기를 당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출발 시각을 10분쯤 넘겨서야 버스가 도착했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시굴다로 향했습니다.


투라이다 성까지, 눈길 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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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굴다에 도착하면 진짜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버스터미널과 기차역 앞에서 투라이다 성까지 가는 버스가 있지만, 이곳은 트래킹 명소로 유명합니다. 저는 눈 덮인 숲길을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편도 5km, 왕복 10km, 넉넉잡아 3시간의 산책입니다.


걷다 보니 길가에 커다란 지팡이 모형이 나타났습니다. 시굴다의 명물 ‘지팡이’는 200년 전부터 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많아, 지팡이를 팔아 길잡이와 기념품 역할을 했다고 하죠. 지금도 길을 안내할 때 “지팡이 공원에서 몇 시 방향”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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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덮인 계단에는 발자국 하나 없었습니다. 아마 제가 그날 첫 번째로 지나간 손님이었을 겁니다. 쓸데없는 자부심에 힘든 줄도 모르고 한참을 걸었습니다.


사랑과 비극의 장소, 구트마니스 동굴


투라이다 성으로 가는 길목에 ‘구트마니스 동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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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동굴이라고 불리는 이곳에는 벽면 가득 이름과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유를 물으면, 사람들은 ‘투라이다의 장미’ 마이야의 전설을 이야기합니다.


17세기, 투라이다 성이 스웨덴군에 점령되었을 때 고아가 된 소녀를 한 병사가 거두어 ‘마이야’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녀는 자라 착한 성품과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정원사 빅토르와 약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 동굴에서 자주 만나 사랑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한 폴란드 병사가 마이야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자, 빅토르의 편지를 위조해 그녀를 동굴로 유인했습니다. 속았음을 깨달은 마이야는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범인은 숲에서 자결했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빅토르는 연인의 시신을 발견했지만, 억울하게도 살인범으로 몰렸습니다. 다행히 주변인의 증언으로 누명을 벗었으나, 그는 평생 마이야를 추모하며 정원을 가꾸며 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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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곳은 ‘사랑의 동굴’이 되었고, 연인들이 이름을 새기고 가는 명소가 되었죠. 다만 저는 ‘저 이름을 새긴 커플들, 지금도 잘 살고 있을까?’ 하는 못된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폭설 속의 투라이다 성


마침내 투라이다 성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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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가 성립되기 전, 리보니아를 지배하던 대주교와 기사단의 거점이었던 곳입니다. ‘투라이다’는 ‘신들의 정원’이라는 뜻이지만, 폭설로 덮인 오늘은 그 이름이 무색했습니다. 가을이면 단풍이 절경이라 하니, 이곳은 겨울을 피해서 오는 것을 강력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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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내부는 박물관으로, 당시 기사단과 주교가 사용했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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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바깥 한쪽에는 마이야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오늘만큼은 저 혼자 이곳을 찾은 듯, 비석 앞으로 가는 길에는 발자국이 단 하나만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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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굴다로


성에서 시굴다로 돌아가는 길, 저는 끝까지 걸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올 때는 걸어도 돌아갈 때는 버스를 타는 편이 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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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리가로 돌아왔습니다. 폭설 속에 고생은 했지만, 뿌듯함이 오래 남는 하루였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으며 느낀 건, 때로는 불편함이 여행의 맛을 더 깊게 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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