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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로 밀어도 다시 세워진 수만 개의 십자가

독재정권도 꺾지못한 리투아니아인들의 신을 향한 마음

by 타이준

새벽, 리가에서 길을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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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 새벽 6시. 아침 공기는 여전히 밤의 잔향을 품고 있었습니다. 라트비아 리가의 가로등 불빛은 희미하게 깜빡이며 마지막 어둠을 붙잡고 있었고, 인적 드문 거리에는 캐리어 바퀴 소리와 제 발걸음만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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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라트비아를 떠나 리투아니아의 도시 샤울레이로 향하는 날.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겨울 새벽 특유의 서늘함, 그리고 금속성 냄새가 섞인 듯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자 천천히 리가의 불빛이 멀어지고, 창밖에는 눈 덮인 들판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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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의 ‘교통 중심지’, 샤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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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 풍경을 바라보다 꾸벅꾸벅 졸기를 반복하며 두 시간 남짓 달려 샤울레이에 도착했습니다.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다른 도시에 도착한 듯한 자연스러운 전환이었습니다.


이곳은 인구 약 10만 명의 도시로, 한국으로 치면 작은 시 정도의 규모지만, 총인구가 290만 명이 채 안 되는 리투아니아에서는 네 번째로 큰 대도시이자 중부 지역의 핵심 거점입니다.


수도 빌뉴스와 항구 도시 클라이페다를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로서 오랜 세월 물류와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샤울레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도심이 아닌, 북쪽 교외의 작은 언덕 십자가 언덕입니다.


도만타이행 버스와 ‘크리주 칼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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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에 짐을 맡기고 매표소에서 “크리주 칼나스”라고 말하니,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 시간표를 건네주었습니다. 영어로 ‘Hill of Crosses’라고 해도, 종이에 십자가를 그려 보여줘도 모두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 언덕행 직행 버스가 있는 것은 아니고, 도만타이행 버스가 중간에 한 번 정차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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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님의 손짓을 따라 내리니 사방이 황량한 벌판뿐이었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구글맵을 확인하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길을 따라 20분가량 걸어야 언덕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뺨을 파고드는 동안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십자가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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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벌판을 걷다 보니 작은 숲처럼 보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수만 개의 십자가였습니다.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언덕을 빽빽하게 뒤덮고 있었고, 그 위로 가벼운 눈발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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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시작은 19세기 러시아 제국에 맞선 봉기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한 개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 시대 종교 탄압이 시작되자, 이 언덕은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불도저로 밀어도 하룻밤 사이 누군가 다시 세워놓는 일이 반복되었죠. 이른바 ‘십자가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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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 좁은 길을 걸으며 나무, 금속, 돌, 심지어 플라스틱으로 만든 십자가들을 스쳤습니다. 바람에 묵주와 십자가가 부딪혀 잔잔한 소리가 퍼지고, 오래된 십자가 사이로 최근에 세운 십자가도 보였습니다. 언덕 뒤편에는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사를 집전했던 예배당이 고요히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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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힘에 대한 공감


십자가 언덕은 종교적 성지이자 민족의 자존심이자, 동시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선언문 같은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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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교인이 아니지만, 이곳에서 느낀 감정은 단순한 신앙심에 대한 경외를 넘어섰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굴하지 않고, 신앙을 무기로 맞서 이겨낸 사람들의 의지였습니다.


그 수많은 십자가들이 서 있는 모습은, 신앙이 한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방패와 깃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정치적 무력보다도 강력한 힘이 되어 역사의 한 장을 바꾸었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과 존경이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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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면 십자가밖에 없는 곳이지만, 그 십자가만으로 충분한 곳.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신앙, 저항정신, 그리고 역사까지 응축된 공간이었습니다.


버스 창밖으로 언덕이 점점 멀어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 짧지만 강렬한 순간이, 아마도 샤울레이가 제게 남긴 가장 깊은 인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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