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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에만 독립하는 나라? 우주피스 공화국

리투아니아 빌뉴스 안의 우주피스 공화국, 강 너머의 공화국에서

by 타이준

우주피스, 강 너머의 공화국에서


빌뉴스에 머문 며칠째 밤, 숙소 근처 마트에 과자와 음료, 맥주를 사러 갔습니다. 낯선 도시에서의 소소한 일상이었지요.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어두운 골목에서 뜻밖의 장면이 제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벽에 붙은 금속판 위, 한국어로 새겨진 문장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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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실수할 권리가 있다.”


리투아니아의 골목에서, 그것도 묵직한 철판에 적힌 모국어 문장을 마주하다니. 그냥 이건 낙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새겨진 헌법 조항 같은 글귀. ‘이곳은 도대체 어떤 동네일까?’ 궁금증이 가시지 않아, 저는 다음날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강 너머의 작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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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자마자 숙소 직원에게 묻고, 인터넷으로도 뒤적여 보았습니다. 그곳은 우주피스 라는 마을이었습니다. 리투아니아어로 '강 너머'를 뜻하는 이름 그대로, 빌뉴스 시내에서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면 도착하는 “강 너머”의 마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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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주피스는 그냥 작은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1997년 4월 1일, 이곳의 예술가들은 모여 이 마을을 ‘공화국’이라 선포했습니다. 대통령이 있고, 국기가 있으며, 각 내각의 장관에 헌법까지 갖춘 나라. 누군가에겐 장난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선언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만우절마다 입국심사를 하고 축제를 여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날만큼은 이곳이 진짜 하나의 국가로 살아난다고 합니다.


벽에 새겨진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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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보았던 그 문장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파우피오 거리에 갔습니다. 그곳 벽에는 한국어를 비롯해 23개 언어로 번역된 헌법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고양이는 주인을 사랑할 의무가 없다. 하지만 어려울 때 도와야 한다.”


단순하지만, 동시에 묵직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저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작은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어떤 조항을 헌법에 넣을 수 있을까? 내가 내리는 결정이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되진 않을까? 권리와 책임은 어디까지 닿아야 할까?”


생각이 꼬리를 물며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하지만 다시 곱씹어 보니, 우주피스 헌법은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반드시 적극적으로 행사할 필요는 없다. 각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하는 것도 자유다.


어쩌면 인생을 지나치게 무겁게 고민할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살아도 된다는 깨달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예술가들의 공화국이 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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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피스의 헌법은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유머러스하고 가볍게 읽히지만, 그 속에는 삶의 본질이 담겨 있었습니다. 권리와 자유,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


천사상이 서 있는 광장에서 저는 오래 머물렀습니다. 강 너머의 이 작은 공화국은 제게 조용히 물어오는 듯했습니다.


“너라면 어떤 나라를 만들겠는가? 그 나라의 헌법에는 무엇을 적을 것인가? 그리고, 너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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