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자 퇴계와 두 가문 사이의 이야기가 얽힌 곳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예전에는 경복궁, 만리장성, 에펠탑처럼 인간이 만든 건축물의 장엄함에 더 끌렸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의 풍경이 더 마음을 움직입니다.
역사는 신이 쓴 드라마이고, 자연은 신이 만든 예술작품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예술에 인간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함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자연이 빚은 아름다움 속에 인간의 시와 자존심이 새겨진 곳, 거창 수승대를 찾았습니다.
수승대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물소리가 바위에 부딪히며 은은하게 퍼집니다.
그 물길을 따라가니 커다란 거북바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천천히 물가를 향해 나아가는 듯한 모양새.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바위를 수승대의 상징으로 여겨왔습니다.
사실 ‘수승대’라 하면 이 일대의 계곡 전체를 가리키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이 거북바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승대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본래 이곳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이곳에서, 신라로 향하는 백제 사신들이 근심에 젖어 서로를 배웅했다 하여 붙은 이름이지요. 이름부터 한숨이 묻어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자 퇴계 이황이 이곳을 찾아 시를 한 수 읊었습니다.
그는 절벽과 물빛이 어우러진 풍경을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송대(愁送臺)라니, 이름이 좋지 않소이다.
차라리 수승대(搜勝臺)라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근심(愁) 대신 빼어난 승경을 찾는다는 뜻의 ‘搜勝’.
퇴계의 한마디에 이 계곡은 근심의 자리를 벗어나, 아름다움을 찾는 곳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거창 신씨 가문의 신권은 깊이 감동했습니다.
그는 퇴계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럽네. (深荷珍重敎殊絶恨望懷)”
그리고 그는 바위에 ‘수승대’라는 세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 계곡은 슬픔의 자리가 아닌 ‘승경을 찾는 자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풍경에도, 사람의 마음은 늘 복잡합니다.
신권의 처남이자, 은진 임씨 가문의 임훈은 그 일이 못마땅했습니다.
“퇴계면 퇴계지, 남의 고을 이름을 제멋대로 바꾸다니?”
그 불만은 곧 시로 표현되었습니다.
“봄을 보내는 시름만 아니라, 그대를 보내는 시름도 있네. (不濁愁春愁送君)”
‘愁(수)’ 자가 두 번이나 들어간 이 시는, 퇴계가 없애려 했던 바로 그 글자를 다시 불러왔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하자면, 조선판 시로 하는 자존심 대결, 지금으로 치면 거창 신씨와 은진 임씨의 댓글 싸움이나 프리스타일 랩 배틀이 벌어진 셈이지요.
그들이 주고받은 시는 지금도 거북바위 근처 바위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바위에 남은 글자마다 사람의 자존심과 감정이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합니다.
그 길을 따라 더 걸어가니, 계곡 위로 길게 걸린 흔들 다리가 보였습니다.
처음엔 조금 의아했습니다.
“이런 고요한 계곡에 웬 출렁 다리일까?”
하지만 막상 발을 올려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바람이 불자 다리가 살짝 흔들렸고, 다리 한가운데는 더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아찔함을 이겨내고 옆을 보니 그 아래로는 퇴계가 “승경”이라 칭송했던 맑은 계곡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약간 흐린 날이었음에도 물은 맑았고, 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조금의 아찔함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돌아보면, 수승대는 자연이 빚은 예술에 인간의 감정이 새겨진 무대였습니다.
퇴계의 이상과 신권의 존경, 그리고 임훈의 불만이 한 계곡에 얽혀 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계곡의 물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게 흐르고, 바위의 글씨는 여전히 그때의 논쟁을 품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흔들리더라도 끝내 건너가려는 마음에서 완성되는 것 아닐까?
수승대는 그런 마음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