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마셔도 취한다: 병 속에 보관한 여행의 밤
사실 저는 술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예전의 저는 소주를 ‘식용 에탄올에 감미료를 섞은 저질 음료’라 생각했고, 맥주는 그저 목을 축이는 용도일 뿐이었습니다.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같은 건 부자들이나 마시는, 다른 세계의 음료쯤으로 느껴졌죠.
여행을 하며 세계 곳곳을 다녔지만, 정작 그 나라의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쉽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 면세점에서 한 병씩 고르거나, 진열대에서 가장 신기해 보이는 술을 골라 집 찬장에 전시해두는 정도였습니다.
그 술들은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행의 흔적처럼 남겨둔 기념품이었죠.
술을 마시면 컨디션이 흐트러질까봐 조심했거든요.
지금도 여행 중엔 과음하지 않습니다.
그 선택이 옳다고 믿지만, 한편으로는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낯선 곳에서는 음주를 자제하는 게 결국 정답이겠죠.
그래서 저는 ‘술을 마시는 여행자’보다는, 술을 눈으로 보고 기억하는 여행자로 남기로 했습니다.
잔을 들기보다, 그 순간의 향과 분위기, 그리고 그 술을 만나게 된 과정을 마음에 담는 쪽을 택한 겁니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면, 그 절제는 어쩌면 제게 ‘한 모금의 이야기’를 놓치게 한 셈이었지만,
그래도 그 선택이 옳았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이 멈추자, 저는 오히려 술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마트 진열대에 놓인 각양각색의 외국 술들을 보며, 가본 나라의 기억이 스치고,
가보지 못한 곳은 ‘그곳의 물과 공기는 어떤 맛일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 병, 또 한 병씩 집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는 직접 그 나라에 가서 구하거나 마신 술도 있고, 리쿼샵을 돌아다니며 어렵게 손에 넣은 술들도 있습니다.
각각의 병에는 저마다의 여정과 사연이 깃들어 있지요.
그래서 이제 그 술들을 단순히 ‘마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
그 나라의 시간과 공기가 어떤 맛으로 남았는지 조금씩 풀어보고 싶습니다.
대부분은 혼자 마시기엔 아까워 아직 뜯지 않고 모셔둔 술도 있고, 모임에 들고 가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함께 나눈 술도 있습니다.
마셨든 안 마셨든, 그 술들은 제게 기억의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