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레예프가 만든 도수, 보드카 러시안 스탠다드 40도

러시아의 냉기, 그 겨울의 냄새를 불러오는 보드카

by 타이준

보드카 하면 떠오르는 나라, 단연 러시아입니다.

물론 폴란드가 ‘보드카의 원조’라고 주장하지만, 세계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언제나 러시아죠.

마치 벨기에가 감자튀김의 원조라고 외쳐도 사람들은 여전히 ‘프렌치 프라이’라 부르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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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무엇이든, 결국 이미지와 기억의 힘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보드카는 바로 러시안 스탠다드(Russian Standard) 입니다.

러시아어로는 “루스키 스딴다르뜨(Русский Стандарт)”라고 발음하죠.


사실 제가 러시아어를 배우고 처음으로 실전에서 썼던 문장이 바로 이겁니다.

“보드카, 루스키 스딴다르뜨 있어요?”

지금도 그때의 어색한 억양과 상점 주인의 미소가 기억납니다.


그 전까지는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도 잘 통하지 않아 자신감이 조금 떨어져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단번에 통했습니다.


그 순간, ‘의미가 통한다’는 기쁨을 보드카 한 병을 통해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 술의 이름처럼, 러시안 스탠다드는 말 그대로 보드카의 ‘표준’을 뜻합니다.


도수는 정확히 40도. 러시아 화학의 아버지, 주기율표를 만든 디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정립한 수치라고 알려져 있죠.

과학적 근거라기보다는, 러시아인들이 가장 ‘편안하게 취할 수 있는’ 농도이자

가장 사랑받던 도수였던 셈입니다.

화학자답지 않게, 그는 실험보다 통계로 도수를 정했다고 하죠.

과학보다 인간의 감각이 앞서던 시대의 낭만이 아닐까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정작 러시아 친구들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이 보드카를 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름도 낯선 지방 보드카를 꺼내곤 했습니다.

‘러시안 스탠다드’는 어쩌면 외국인이 먼저 알아본 러시아의 얼굴, 혹은 ‘가장 세계적인 러시아 보드카’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러시안 스탠다드 은행이 길거리 곳곳에 있는 걸 보면 관광객 전용 브랜드라기보다는, 러시아 내에서도 조금 고급스러운 보드카에 속하는 듯합니다.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 술은 어쩐지 현지인보다 여행자가 먼저 알아본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전경’ 같은 술이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의 마트나 아시아 식료품점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진한 유리병에 새겨진 곰과 독수리가 어울린 로고, 금속성 빛이 도는 라벨, 그리고 병을 열 때 들리는 짧은 “퍽” 소리.

위스키의 ‘뻥’ 하는 개봉음과는 달리, 약간 묵직한 ‘퍽’ 러시아 겨울의 공기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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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것이 묘하게 러시아의 냉기, 그 겨울의 냄새를 불러옵니다.

한 모금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처럼 다가오는 술.

그래서 이 술을 마실 때마다 저는 늘 러시아의 거리와 사람들, 그리고 그날의 작은 성공을 함께 떠올립니다.

보드카를 맛있게 마시는 방법은 역시 냉동실에 두었다가 꺼내 마시는 것입니다.


입술이 살짝 얼 정도로 차가운 그 온도, 마치 러시아의 겨울을 한 모금 삼키는 느낌이 들죠.

그래서 제 냉동고에는 언제나 이 술이 한 병 들어 있습니다.

가끔 누군가에게 이 보드카를 대접할 때면, 저는 자연스레 그날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건 제가 러시아어로 처음 주문한 술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한 잔의 보드카는 다시 작은 여행이 되고, 그렇게 제 안의 이야기는 또 한 번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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