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면천읍성 : 고요한 돌담 아래 흐르는 옛 시간

성곽의 나라를 걷다 : 충남 면천읍성에서 만난 시간

by 타이준

조선 세종 시대 학자 양성지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다”라고 말했습니다.

도시화된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표현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한반도 곳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성이 남아 있습니다.


도읍을 지키던 서울의 성곽, 지방 고을을 둘러싼 읍성, 전란에 대비한 산성, 그리고 일본군이 남긴 왜성까지.

그 돌들이 품은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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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찾은 곳은 충남 당진의 면천읍성입니다.


한때 충청도의 요충지였던 면천은 조선 시대 내내 군사적, 행정적 요지였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둘레 약 2킬로미터, 높이 약 5미터로, 조선 중기에 처음 쌓았다가 여러 차례 개수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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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돌담과 초가,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마을 풍경이 펼쳐집니다.

조용하지만, 돌 하나하나에 세월의 결이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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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에는 조선 시대 지방 행정의 중심 건물인 객사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객사는 수령이 왕의 궐패를 모시고 충성을 맹세하던 상징적인 공간이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사신이 머물던 숙소의 역할도 했습니다.

지금은 한적한 마당과 빈 기둥만 남아 있지만, 그 자리는 한때 중앙집권의 상징이자 지방 행정의 중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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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 앞에는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습니다.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집니다.

복지겸이 귀향해 병을 앓고 있을 때, 그의 딸이 이곳에서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뜰 앞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고, 산의 진달래꽃과 안샘물로 술을 빚어 백일 동안 익힌 뒤 아버지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행했고, 장군의 병이 거짓말처럼 나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집니다.

왕에 대한 충성과 가족에 대한 효심, 두 이야기가 객사 앞마당에서 만나는 순간,

이곳이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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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군자지라는 연못이 있고, 그 위에는 군자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름처럼 군자의 덕을 기리고, 수령이 고을의 안정을 기원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잔잔한 물결 위로 연잎 몇 장만 떠 있지만, 연못가의 풍경은 고요하고 단정했습니다.

복원된 초가집과 기와집이 어우러져 조선 시대 읍성의 정취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돌들이 이어집니다.

그 돌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었고, 전란의 불길과 세월의 비바람을 견뎌온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면천읍성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담백한 모습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이곳은 권력의 상징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삶이 쌓인 성곽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크게 남은 것만이 아니라, 조용히 버텨온 것들 속에서도 흐르고 있습니다.

면천읍성의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그 고요한 흐름이 귓가에 닿는 듯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람의 시간, 그 시간이 이 성 안을 천천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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