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엔 없던 이야기, 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청주에서 태어났다
‘직지심체요절.’
청주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그동안 이 책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설명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인지, 왜 이 책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청주를 찾으며 ‘직지를 만든 자리’보다 먼저, ‘직지가 말하려던 내용’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이 '청주고인쇄박물관' 이었습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금속활자였습니다.
활자장인이 전통 방식으로 복원한 금속활자의 실제 모습.
책으로만,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직지’가 이제는 손에 잡힐 듯한 사물로 눈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차갑고 단단해 보이지만, 이 작은 금속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찍어냈다는 사실이 묘하게 다가왔습니다.
이곳에서의 관람은 그렇게 기술이 아닌 감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전시 공간을 따라 걷다 보면 관람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넓어집니다.
이곳은 단순히 직지심체요절 만을 다루는 박물관이 아닙니다.
직지의 탄생 배경은 물론, 고려 이전부터 조선,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쇄 기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목판 인쇄에서 금속활자로, 그리고 근대의 납활자와 인쇄기까지.
글자를 찍는 방식이 바뀔 때마다 지식이 퍼지는 속도도, 세상이 변하는 방식도 함께 달라졌다는 사실을 전시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는 이제 결과처럼 느껴질 뿐, 그 이전에 축적된 기술과 시간이 먼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시선이 벽으로 옮겨집니다.
중간중간 벽면에는 직지심체요절의 문구를 인용한 글들이 조용히 걸려 있습니다.
망상이 끊어져 마음이 쉬면, 그게 바로 쉬는 때이다.
모였다 흩어지는 것은 뜬구름과 다름없다.
지혜로운 이는 물질에도 걸림이 없으니,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어려운 해설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짧은 문장들이 전시 설명보다 오래 머뭅니다.
‘깨달음’이나 ‘수행’이라는 단어를 몰라도 지금의 삶에 그대로 대입해 볼 수 있는 말들이었습니다.
생각이 많아 쉬지 못하는 마음, 붙잡고 놓지 못하는 일들,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순간들.
이 책이 왜 수백 년이 지나서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의 정식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러 스님들이 남긴 ‘마음에 대한 말’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부처와 선사들의 가르침 가운데 지금 읽어도 의미가 있는 문장들을 가려 뽑아 300편이 넘는 글로 묶었습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보면, 그 마음 자체가 이미 깨달음이다.
그래서 직지의 문장들은 설명하기보다 단정하고, 가르치기보다 스스로 돌아보게 만듭니다.
전시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흥덕사에서 1377년 금속활자로 찍어낸 『직지』는 원래 상·하 두 권이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금속활자본은 하권 한 책뿐입니다. 그리고 그 원본은 지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불법 약탈은 아니었습니다. 구입과 수집의 과정을 거쳐 프랑스로 건너간 책입니다.
이 사실 앞에서 마음은 단순하게 아쉽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외국에 있었기에 한국전쟁이라는 전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답 없는 생각들이 전시장 한편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박물관을 다 보고 나서야 길 건너에 있는 흥덕사지로 향했습니다.
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었지만, 이제 이곳은 더 이상 빈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활자를 만들고, 문장을 골라 책을 엮고, 사람의 마음을 전하려 했던 자리.
직지를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생각이자 질문으로 알고 난 뒤에 걷는 흥덕사지는 확실히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직지의 위대함을 강조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말을 먼저 들여다보게 만드는 공간이었습니다.
활자는 오래되었지만, 그 문장들은 여전히 현재형입니다.
책을 알고 나서야 그 책이 태어난 자리를 이해하게 되는 경험.
청주고인쇄박물관은 그 순서를 조용히 안내해 주는 장소였습니다.